(평화의 섬 제주에서 바티칸까지⑨)수련꽃 더욱 붉다

입력 : 2022-10-05 오전 10:56:22
베트남인들의 자존심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가? 다소 왜소해 보이지만 어깨가 쭉 펴졌고 얼굴은 당당하고 행동에는 비굴함이 아예 애초부터 없다. 그런 자존심의 중심에는 온화한 이웃집 아저씨와도 같은 옹골찬 지도자 호찌민이 있다. 베트남 사람들은 말한다. 베트남은 한 번도 분단된 적이 없다고. 베트남은 호찌민이란 이름 아래서 언제나 하나였다고!
 
아직도 베트남 인민들 가슴에 살아서 인민들과 숨 쉬는 호찌민 영묘 앞에서 첫발을 내딛으면서 그런 이웃집 아저씨처럼 친근감이 가고 청빈하게 살면서 인민을 올바르게 안내한 그런 지도자를 그린다. 이야기만 들어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감동을 주는 삶을 살다간 호찌민이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곳이다. 그가 가장 존경한 사람 중의 하나가 조선의 실학자 정약용이라고 한다. 그는 정약용을 너무 존경해서 그의 저서인 목민심서를 늘 베게 밑에 두고 읽었다고 한다.
 
그런 지도자를 부러워하면서 베트남 인민이 가장 존경하는 호찌민 영묘 앞에서 출발하기로 결정하였다. 출정식에는 한인회 임원들과 한화중 교무, 영찬 엄마, 성남 평통회장, 가야금 연주자 하소라 씨와 이번행사를 위하여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는 이한용 준비위원장이 같이 하였다.
 
베트남의 도로는 차와 오토바이에서 울려대는 고막을 찢을 것 같은 소음과 매연을 감당하기에 너무 버겁다. 신호등조차 없는 무질서와 혼돈 속에서 화를 내거나 짜증내지 않는 그들의 무표정한 얼굴이 오히려 흥미를 유발한다. 그런데도 지옥의 아비규환을 찾아 달리기라도 하는 양 일방통행로의 반대 방향으로 역 주행하는 오토바이와 마주치면 가슴이 철렁한다. 이런 곳에서 잠시 긴장의 끈을 놓았다가는 사고 나기 십상이다.
 
사흘 만에 닌빈에 도착하였다. 동행하는 조헌정 목사님의 옛 향린교회 교우인 남택우 씨가 연락이 되어 저녁식사에 초대하였다. 그는 대화중에 옛 노무현대통령 방문 시에 일화를 들려주었다. 독일 대통령 헬무트 콜 수상이 폴란드 유대인 수용소를 방문할 때 무릎 꿇고 사죄하였듯이 사죄를 하겠다는 요청을 했지만 베트남 정부에서 거절을 했다고 한다. “귀하의 나라는 미국의 용병이었으므로 용병은 사죄할 자격이 없다.”
 
공식적으로 사죄는 하지 못하고 무산되었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기자회견 중 이를 언급하시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는데 이 장면이 베트남 국민들이 베트남 국민들의 감동을 불러일으킨 모양이다. 사실 그때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그 장면을 보는 한국국민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베트남 정부는 사과를 거절했지만 베트남 국민은 한국이 사죄를 한 것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모든 진실 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옷깃에 제 옷깃이 스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점심식사를 하고 나오는데 한 아가씨가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한다. 다가가서 나도 인사를 하니 “한국 사람이세요?”, “네, 저 오늘 한국 회사에 면접 봤어요” 한다. 조금 더 가니 누가 나를 부른다. 나는 웬만하면 가던 길을  되돌아가지 않지만 하도 반갑게 부르기에 되돌아가니 두 부부가 한국사람 아니냐고 한다. 자기들은 가리봉동에서 12년간 살다왔다며 한국에서 돈 벌어 슈퍼를 차렸다며 음료수를 전해준다. 그 이야기가 나의 감정선을 건드렸다. 나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1945년 9월 2일 호찌민은 상기된 표정으로 하노이 바딘 광장에서 자신이 손수 문안을 작성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있었다. 역사적인 베트남민주공화국 수립과 독립을 선포하는 자리였다. 그는 그을린 얼굴에 움푹 들어간 눈에 빛이 바랜 카키색 양복과 고무 타이어를 잘라 만든 슬리퍼 차림이었다.
 
그가 읽은 베트남 독립선언문의 시작은 1776년 토머스 제퍼슨의 작성한 미국의 독립선언문 서문과 비슷다. 소수를 제외한 일반 대중들은 그의 연설을 듣기 전까지 그가 1930년 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한 애국자 응우옌 아이 쿠옥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연설을 통해 자신이 바로 베트남의 전설의 독립운동가이자 애국자인 응우옌 아이 쿠옥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모두가 놀랐다.
 
“자유와 독립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호찌민의 이 말은 수많은 젊은이들을 감동시켜 전장에 자원입대하게 하였다. 그러나 전쟁은 길고 처참했다. 남북의 젊은이 150만 이상이 죽어갔다. 그들의 희생을 요구한 것은 호찌민이었다. 호찌민은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첫사랑의 달콤한 키스의 추억조차 가지지 못한 채 희생된 그들에게 평생 부채감에 시달렸다. 그들을 생각하면 언제나 그의 양 볼에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외침을 많이 받은 비극의 나라 베트남 인민들은 노무현의 눈물에 감동을 받기 전에 이미 호찌민의 눈물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강명구 평화마라토너가 지난 3일 베트남 난빈에서 한 소녀와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강명구 평화마라토너)
 
강명구 평화마라토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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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