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재범 기자] ‘파묘’에 이어 ‘범죄도시4’까지. 천만 흥행 문턱을 넘어서는 영화가 올 상반기만도 2편에 이를 전망입니다. 하지만 화려해 보이는 흥행성적과는 달리 한국 영화시장 속 사정은 ‘속 빈 강정’입니다. 개봉관을 찾지 못해 창고에 쌓인 영화가 넘쳐나면서 신작 영화에 대한 기획과 투자가 사실상 ‘멈춤’을 한 상태이고, 어쩌다 들려오는 신작 영화는 이전 흥행작들의 ‘자가 복제’ 경향을 띠고 있습니다. 게다가 획일화된 한국영화의 작품성이 일정 수준에 미치지 못하니 해외 영화제 경쟁 부문에선 자취를 감추고 국내 콘텐츠 소재만 빼가는 해외 리메이크 제작만이 봇물을 이루고 있습니다.
역대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올라 수상을 한 한국영화들. 올드보이(심사위원대상) 박쥐(심사위원상), 기생충(황금종려상), 헤어질 결심(감독상)
해외영화제에서 존재감 흐려진 한국영화
작년부터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서 한국영화가 실종됐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2004년 ‘올드보이’ 이후 한국영화는 칸 영화제 경쟁 부문의 문을 지속적으로 두드려 왔습니다. 2012년 ‘돈의 맛’과 2016년 ‘아가씨’를 제외하곤 후보에 오른 작품들은 실제 수상의 영광을 안았습니다. 2003년 ‘올드보이’ 심사위원대상, 2009년 ‘박쥐’ 심사위원상, 2010년 ‘시’ 각본상, 2019년 ‘기생충’ 황금종려상, 2022년 ‘헤어질 결심’ 감독상, 2022년 ‘브로커’ 남우주연상 소식이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작년과 올해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한국영화는 한 편도 후보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대신 한국영화는 비경쟁부문, 장르영화를 소개하는 심야 상영 섹션에 주로 초대를 받았습니다. 올해도 이 부문에 ‘베테랑2’가 초청됐고 작년에는 ‘헌트’가 초청됐습니다. 독립영화계 관계자들이 “해외영화제에서도 상업성을 띤 장르물이 아니면 한국영화는 쳐다보지 않는다”고 입을 모은 것처럼 한국영화=장르물’이라는 공식이 굳어져 가는 것입니다.
아카데미 영광도 ‘기생충’에서 그치고 있습니다. 2021년 ‘기생충’이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 등 4관왕을 차지한 뒤 이듬해 ‘미나리’가 여우조연상을 수상했지만 ‘미나리’는 한국배우들이 출연했을 뿐 한국영화가 아닙니다. 미국 국적 감독이 미국 자본으로 제작한 미국 영화입니다. 올해 ‘패스트라이브즈’가 작품상과 각본상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이 불발됐습니다.
해외 영화제에서 한국영화 존재감이 흐릿해진 사이 한국영화를 리메이크하는 움직임은 더 활발해졌습니다. ‘지구를 지켜라’(2003년작), ‘올드보이’(2003년, TV시리즈 리메이크), ‘해무’(2014년작) ‘악인전’(2019년작), ‘범죄도시’ 시리즈가 최근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를 확정했습니다.
영화계 관계자는 “해외 리메이크를 좋다고 할 수만은 없는 게 정말 해외에 소개하고 싶은 영화라면 리메이크를 위한 저작권이 아닌 해외 배급권을 가져가야 했다”며 “한 마디로 리메이크라는 게 소재만 쏙 빼먹겠다는 뜻”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나마도 범죄도시 시리즈를 제외하면 리메이크를 확정한 작품들은 모두 현재가 아닌 과거 한국영화 부흥기에 제작이 이뤄졌던 작품들입니다.
2019년 11월 영화인들이 모여 영화 다양성 확보와 독과점 해소를 위한 영화인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스크린 독과점을 우려’하는 영화인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영화법 개정, 규제와 지원 정책 병행을 촉구한 바 있다. 하지만 5년이 지난 현재까지 달라진 것은 없다. 사진=뉴시스
‘넥스트 기생충’은 없다
‘기생충’의 영광이 불과 몇 년 전입니다. 한국영화는 어쩌다 지금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됐을까요. 한 영화감독의 말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감독은 “기생충’은 한국식 계층 간 갈등 구조가 전 세계인의 공감대를 샀기 때문”이라며 “해외시장이 한국영화에 주목한 것은 화려함이나 규모가 아닌 소재의 변별력과 깊이에 녹아있는 작품성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다양한 소재의 뛰어난 작품성을 지닌 영화는 감독 혼자 만들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기획부터 제작, 투자에서 배급과 홍보까지 영화시장 전반의 환경이 뒷받침돼야 창작자가 마음 놓고 창작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한국영화 시장은 기획부터 제작 투자 배급과 상영 그리고 홍보까지 모든 것이 대기업 중심의 철저한 자본 논리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영화가 하나의 문학작품이 아닌 ‘자본 회수’를 위한 일회성 콘텐츠로 역할을 떠맡게 된 모습입니다.
한 제작사 관계자는 “창의성을 기반으로 한 ‘시도’ 자체가 미덕인 영화사업에서 (경제적) ‘리스크’가 최우선으로 적으로 고려되니 그다음은 뻔한 것 아닌가”라며 “이전에 흥행했던 작품의 장르와 소재를 이어가는 복제 스타일의 영화가 아니면 투자 시장의 선택을 받기도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얘기가 이어지는 소재의 ‘자가복제’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앞으로 자가복제 작품들마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투자 시장 위축이 이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영화계 또 다른 관계자는 “올해와 내년 상반기까지 코로나19 이후 개봉하지 못한 창고 영화 일부가 공개될 것이다”면서 “그 이후에는 한국 영화시장이 ‘올스톱’ 될 것이란 우려가 실제로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전했습니다.
흔히 “좋은 영화는 결국 관객이 몰린다”고 합니다. 하지만 좋은 영화가 만들어지기 위해선 그만큼 좋은 제작 환경이 뒷받침돼야 합니다. 음지에 씨앗을 뿌려놓고 꽃이 잘 자라지 않으면 그건 꽃의 잘못일까요.
한국영화계를 기획자 중심의 ‘맨 파워 시대’에서 자본 권력 중심 ‘투자 배급 시대’로 전환시킨 대기업 자본, 그 자본의 한 식구로 투자금 회수를 위해 스크린 독과점을 일삼는 멀티플렉스, 자본의 선택을 받기 위해 자신의 전공(장점)을 버리고 획일화된 콘텐츠에만 몰리는 영화인들. 모두의 성찰과 반성, 변화를 위한 자성의 노력 없인 ‘넥스트 기생충’은 없습니다.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