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한·미 조선업 협력, '조선 협의 그룹'으로 제도화해야

양국 수요·공급 정기 조율 가능…한국 주도 협의체 설계 필요

입력 : 2025-06-11 오전 9:38:51
지난해 10월 '2024 국제해양플랜트 전시회'.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 제1전시장 내 HJ중공업 부스를 찾은 관람객들이 9000TEU급 메탄올 DF 컨테이너선, 7700TEU급 LNG DF 컨테이너선, LNG 벙커링선 등 다양한 친환경 선박 모형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뉴시스)
 
최근 미국은 낙후된 자국 조선산업을 재건하기 위한 전략적 파트너로 한국을 주목하고 있다. 트럼프 정부 들어 해양 안보와 물류 주권 강화를 위해 군함, 상선, 쇄빙선 등 다양한 함정을 확보하려는 정책이 추진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 미국 조선소들은 생산 능력, 인력, 기술 측면에서 심각한 한계에 봉착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과 생산 역량을 보유한 한국 조선산업이 미국 해양력 재건의 핵심 파트너로 부상하고 있다. 
 
실제로 한화오션이 미국 필리 조선소 인수를 완료했고, 현대중공업과 삼성중공업도 미국 내 조선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이면서 한·미 간 조선업 협력은 양국의 경제·안보 전략에서 중요한 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이 일회성 이벤트나 민간 차원의 느슨한 협력에 그친다면, 양국이 기대하는 시너지 효과를 장기적으로 확보하긴 어렵다. 체계적이고 지속 가능한 협력 구조를 마련하기 위해 이제는 '조선 협의 그룹(SCG·Shipbuilding Consultative Group)'의 창설이 필요하다. 
 
미국은 한국에 대한 핵 확장 억제 공약을 실효성 있게 이행하기 위해 '핵 협의 그룹(NCG·Nuclear Consultative Group)'이라는 정례 협의체를 출범시킨 바 있다. NCG는 양국 간 정례 회의를 통해 의제 설정, 정보 공유, 공동 연습 계획 수립 등 정책 공조를 제도화하고 있으며, 이 모델은 외교·안보 분야를 넘어 경제·산업 안보 분야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조선 협의 그룹 역시 이와 유사한 형태로 한미 간 조선 산업 협력을 실질적이고 제도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다. 현재도 양국 기업 간, 일부 부처 간 산발적인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구조화되고 지속적인 틀은 아직 미비하다. 
 
조선 협의 그룹은 크게 세 가지 목적을 가질 수 있다. 
 
첫째, 생산 기반 확대와 공급망 구축을 위한 전략 공유다. 미국은 핵추진잠수함, 군수지원함, 대형 상선, 쇄빙선, LNG선 등 대규모 선박들을 자국 내에서 건조하려 하고 있으나 인력과 설비의 부족으로 병목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한국은 이에 대해 설계, 선행 제작, 부품 조달, 기술 이전 등의 역할을 분담할 수 있으며, 협의 그룹을 통해 양국의 수요와 공급 능력을 정기적으로 조율할 수 있다. 
 
둘째, 조선 인력 양성과 기술 이전에 관한 체계적 협력이다. 미국은 숙련 기술 인력–예컨대 용접공, 도장공, 설계 기술자 등–의 심각한 부족에 직면해 있으며, 이는 계획한 건조 일정의 지연을 야기하고 있다. 한국 조선소가 미국 내 훈련 센터를 설립하고, 공동 커리큘럼을 개발하며, 인턴십과 교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이 중요한 해법이 될 수 있다. 조선 협의 그룹은 이 같은 인력 양성 및 기술 협력을 조율하고 표준화하는 핵심 플랫폼이 될 수 있다. 
 
셋째, 군사·안보 조선 프로젝트의 공동 추진이다. 미국은 인도·태평양 전략의 일환으로 연합 해상 전력을 강화하고 있으며, 이에 따른 각종 보조 함정의 건조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한국은 이지스 구축함, 호위함, 군수지원함, 잠수함 등 다양한 함정 건조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의 조달 계획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협의 그룹은 양국 간 우선순위를 조율하고 설계 및 인증 기준을 통일함으로써 시간과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다. 
 
조선 협의 그룹은 미국 주도의 프로그램이 아니, 한국 주도의 대등한 협의체로 설계되어야 한다. 이는 단순한 하청 구조가 아닌 한국의 기술력과 산업 역량이 전략적으로 인정받는 파트너십임을 명확히 하기 위함이다. 미국이 핵 확장 억제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NCG를 운영하듯 한국도 조선 기술력과 산업기반을 미국 안보산업에 기여하는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미국도 이에 상응하는 반대급부로서 한국에 우라늄 농축 및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 시설을 허용하여 군함, 쇄빙선용 원자로 제작에 기여하는 등 경제·안보 동맹으로서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
 
정기 회의체 운영을 통해 양국은 연간 수주 물량, 인력 수급 전망, 공급망 리스크, 관련 법·제도 현황 등을 공유하고, 공동 대응 방안을 모색할 수 있다. SCG의 운영은 단순한 산업 협력을 넘어 양국의 경제·산업 안보 동맹의 핵심 축으로 기능할 수 있다. 
 
지금이 바로 조선 협의 그룹 창설의 적기다. 기술력과 생산 능력을 갖춘 한국, 전략과 수요를 보유한 미국이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며 공동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절실하다. 이 기회를 제도화하지 못하면 ‘기회의 창’은 쉽게 닫힐 수 있다. 민간업체의 투자와 실행력을 뒷받침하고 국가적 차원의 안정성과 장기성을 담보할 수 있는 고위급 협의체 SCG의 출범이 반드시 필요하다.
 
문근식 한양대 공공정책대학원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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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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