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사이언스)로마의 ‘모든 길’을 복원하다

제국 전성기 도로망 디지털 재현
‘아이티너-e’, 오픈액세스로 제공

입력 : 2025-12-15 오전 10:11:22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All roads lead to Rome).” 중세의 속담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원래는 “천 개의 길이 시대를 초월해 사람들을 로마로 이끈다(Mille viae ducunt homines per saecula Romam)”입니다. 로마 시대에는 모든 도로의 거리를 로마 시내 포룸에 있는 금주석(Miliarium Aureum)을 기점으로 측정했던 데서 비롯합니다.
 
덴마크 아르후스대(Aarhus University) 톰 브루그만스(Tom Brughmans), 스페인 바르셀로나 자율 대학의 파우 데 소토(Pau de Soto), 아담 파주트(Adam Pazout) 교수가 주도한 국제연구팀은 로마 시대 도로망의 실체를 21세기 디지털 기술로 복원했습니다.
 
로마 시대의 도로망의 디지털 데이터셋을 오픈 액세스로 제공하는 Itiner-e의 홈페이지. (이미지=Itiner-e)
 
연구팀은 최근 <네이처 사이언티픽 데이터(Nature Scientific Data)>에 발표한 논문 ‘아이티너-e: 로마제국 도로의 고해상도 데이터셋(Itiner-e: A high-resolution dataset of roads of the Roman Empire)’에서 로마 제국의 고대 도로망을 초고해상도(high-resolution) 공간 데이터로 재구성해 공개했습니다.
 
40만km 넘는 ‘제국의 혈관’
 
로마 제국 전성기의 도로망 총연장은 40만km가 넘는 것으로 추정되며,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만 약 8만km의 군사 도로가 정비될 정도로 그 규모는 압도적이었습니다. 현재 2600만대 이상의 자동차가 다니는 우리나라 도로망 전체가 11만km인 것과 비교하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로마시대 도로는 돌·모래·자갈을 층층이 다져 올린 다층 구조(via strata)로 내구성이 높았고, 노선 곳곳에는 여행자와 군단의 이동을 지원하는 숙소인 만시오(mansio)와 말을 교체하는 역참인 무투아(mutua)가 설치되었습니다. 이런 기반 시설을 바탕으로 로마의 도로는 해안과 내륙, 산악 지대를 가리지 않고 제국 전역을 촘촘히 연결하며 하나의 거대한 네트워크를 구축했습니다.
 
이 거대한 도로 체계는 로마의 군사적 우위를 가능하게 했을 뿐 아니라, 지중해 세계가 단일 경제권으로 통합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제국이 붕괴한 이후에도 도로망의 흔적은 중세 유럽에서 도시와 교역로 형성에 오래도록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지만 그 중요성에 비해 로마 도로에 대한 연구는 그동안 아피아 가도(Via Appia) 같은 거대하고 공학적으로 설계된 대로에만 집중되었거나 지역 단위 조사와 문헌 분석에 머물렀습니다. 그 결과, 최근까지도 제국 전체를 하나로 묶어 이해할 수 있는 포괄적인 고해상도 도로망 데이터는 없었습니다.
 
논문에서 제시한 아이티너-e는 이 공백을 메운 최초의 데이터셋입니다. 연구팀은 고고학적 발굴 자료, 고대 지명 문헌, 기존 로마 도로 연구, 위성 이미지, 역사 지형 복원 모델을 모두 통합해 제국 전체 도로망을 디지털 시공간 구조로 재현했습니다. 많은 로마 도로가 없어지거나 새로운 도로로 포장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에 연구자들은 지형에 대한 항공 분석을 통해 식물의 희미한 흔적이나 높이의 미묘한 변화를 찾아 사라진 길을 찾아냈습니다. 로마 제국의 도로망은 가장 번성했던 서기 150년경에 전성기를 맞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이 데이터베이스는 대략 기원전 312년부터 서기 400년까지 로마의 존속 기간 동안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모든 도로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고대 로마 제국에서 아드리아해 연안에 이르는 대로였던 아피가 가도(Via Appia)의 유적.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이번에 공개된 아이티너-e 데이터셋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보다 초고해상도 공간 정보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로마 도로망 지도보다 몇 배나 정밀한 수준으로 도로의 선형과 분기점, 그리고 지형이 주는 제약 조건까지 세밀하게 반영해 고대 도로의 실제 모습을 훨씬 더 정확하게 재현했습니다. 또 브리타니아 북부에서 북아프리카, 히스파니아, 다누비우스(다뉴브강) 유역, 아나톨리아와 시리아에 이르기까지, 로마가 최대로 영토를 확장했던 시기의 전 지역을 하나의 일관된 공간 구조 안에 담아냈습니다.
 
연구팀은 이를 위해 다양한 사료와 자료를 교차 검증했습니다. 고고학적 유적과 발굴 기록, 로마 시대의 이정표(miliarium), 현대의 지형 분석 모델, 7세기에서 10세기 사이에 필사된 것으로 보이는 안토니누스 여행기(Itinerarium Antonini)와 13세기에 나온 뵈팅거 지도(Tabula Peutingeriana) 같은 고대 문헌까지 폭넓게 통합해 정확도를 높였습니다.
 
아이티너-e는 공개·공유를 전제로 한 데이터셋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큽니다. 고고학자뿐 아니라 도시 연구자, 지리 정보 과학자, 역사가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가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오픈 액세스 형태로 제공함으로써, 학제 간 연구를 북돋울 기반을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고고학 분야의 국제 협업을 강화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고고학의 새로운 연구 플랫폼
 
이 데이터셋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은 매우 다양합니다. 실제 도로의 굴곡과 정렬 방식에서부터 도시 간 이동속도 추정, 지형을 기반으로 한 행정권과 경제권의 분포, 로마 군단이 이동할 수 있는 시간 계산, 교역로의 병목지점 파악까지 폭넓게 분석이 가능합니다. 더 나아가 지중해의 항로와 내륙 도로망이 어떤 방식으로 서로 연결되어 작동했는지도 시각화할 수 있습니다.
 
아이티너-e는 단순한 지도가 아닙니다. 이 데이터셋은 로마 제국이라는 방대한 문명이 어떻게 움직이고, 통치되고, 확장되었는지를 하나의 구조 안에서 파악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분석 도구입니다. 물류와 교역, 행정과 군사, 문화적 네트워크까지 서로 연결된 체계를 통합적으로 보여주며, 로마 세계를 정태적 기록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태적 구조로 탐색할 수 있도록 하는 도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티너-e는 단지 고대 도로의 재현에 그치지 않고, 로마 문명을 읽어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을 새로운 연구 플랫폼에 가깝습니다. 
 
논문 링크: https://www.nature.com/articles/s41597-025-06140-z
 
서경주 객원기자 kjsuh57@naver.com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
서경주 기자
SNS 계정 : 메일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