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숨소리)기러기가 가르쳐주는 삶의 덕목

입력 : 2026-01-26 오후 12:15:42
가을 들녘의 쇠기러기 무리.
 
"기러기 중 작은 것은 '안(雁)'이라 하고 큰 것은 '홍(鴻)'이라 한다. 이 새에게는 네 가지 덕(德)이 있으니…"(빙허각(憑虛閣) 이씨, 『규합총서(閨閤叢書)』,1809)
 
조선 후기 생활 백과인 『규합총서』에는 기러기의 덕목을 다룬 대목이 실려 있습니다. 여기서 안은 쇠기러기, 홍은 큰기러기를 가리킵니다. 저자 빙허각 이씨는 기러기의 생태적 습성을 바탕으로 네 가지 덕목, 신(信), 예(禮), 절(節), 지(智)를 말합니다.
 
기러기는 가을이면 북쪽에서 남쪽으로, 봄이면 남쪽에서 북쪽으로 계절 따라 이동합니다. 해마다 같은 철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그 장면을 '돌아올 때를 알고 약속을 지킨다'고 해서 '신(信)'이라 했습니다. 그렇게 때를 알고 날아오는 기러기들은 질서의 미덕이 있습니다.
 
기러기 무리는 대개 V자 대형을 이뤄 날아옵니다. 선두의 기러기가 바람을 맞고, 뒤따르는 무리는 앞선 새가 만들어내는 흐름을 타며 힘을 아낍니다. 앞자리는 교대합니다. 지친 기러기가 뒤로 물러나면 다른 기러기가 앞으로 나서며 대열을 이끕니다. 역할을 바꾸고 순서를 지키며 함께 날아오는 모습이 이씨가 말한 기러기의 '예(禮)'입니다.
 
한편 기러기는 보통 짝을 이루어 생활하고, 여러 해에 걸쳐 같은 짝과 번식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관계를 한결같이 지키는 그 성품을 절개로 보아 '절(節)'이라고 했습니다.
 
밤이 오면 기러기들은 흩어지지 않고 모여서 쉬는 동안에도 무리 전체가 동시에 잠들지 않습니다. 일부는 고개를 들고 주변을 살피다가 위험을 감지하면 먼저 움직입니다. 그 순간, 기러기 떼는 곧장 일제히 반응합니다. 홀로 남아 표적이 되기보다 무리로서 위험을 분산시키는 편이 더 안전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함으로써 위협을 벗어나는 지혜가 있다 해서 '지(智)'라 했습니다.
 
한반도를 찾아오는 기러기는 주로 쇠기러기(Anser albifrons, White-Fronted Goose)와 큰기러기(Anser fabalis, Bean Goose)입니다. 쇠기러기는 얼굴 쪽, 특히 부리 기부에서 이마로 이어지는 흰 무늬가 있고 몸은 부드러운 회갈색입니다. 약 70㎝로 작은 기러기입니다. 새 이름에 쇠가 들어가는 것은 크기가 작다는 뜻입니다. 반면 큰기러기는 약 90㎝로 더 크고 목이 길며, 검정 부리 끝에 노란 무늬가 있습니다.
 
대열을 갖춰 날아가는 큰기러기.
 
빙허각 이씨에 따르면 쇠기러기는 안이고, 큰기러기는 홍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두 기러기는 시베리아의 습지에서 여름을 보내고 수천㎞를 이동해 한반도와 일본, 중국 남부에서 겨울을 납니다. 국립생물자원관이 발간한 『2024-2025년도 겨울철 조류 동시 센서스』(2025)에 따르면 겨울철 한국에서 관찰되는 쇠기러기는 약 15만마리, 큰기러기는 약 12만마리라고 합니다. 가을과 겨울, 논과 하천에서 이 기러기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들녘에서 먹이를 먹던 기러기들은 해 질 무렵이면 하천 쪽으로 모입니다. 낮 동안 흩어져 있던 개체들이 하나둘 대형을 이루어 날아와 물가에 내려앉습니다. 잠시 왁자지껄 소리가 부풀었다가도 어둠이 내려앉으면 금세 잦아듭니다. 잠들기 전에는 가장자리의 몇 마리가 고개를 들어 어둠을 살핍니다. 때를 살펴 대열을 갖춰 날아오고, 함께 모여 밤을 세우는 그 장면은 얼핏 평화로운 하루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하루하루를 모아 한 계절을 무사히 보내기 위해 끊임없이 주변을 살피고 서로를 지키는 치열한 삶의 현장입니다.
 
이에 『규합총서』에 나오는 기러기들의 네 가지 덕목 신, 예, 절, 지를 떠올려봅니다. 스스로 정한 시간과 원칙을 지키고, 함께하는 이들을 배려하며 역할을 나눠 협동하고, 관계를 함부로 소모하지 않고 오래 돌보며, 필요한 때를 위해 결단하고 행동하는 지혜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러기들의 모습으로부터 스스로를 성찰하며 음력으로 다가오는 새해를 준비해봅니다.
 
글·사진= 김용재 생태칼럼리스트 K-wil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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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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