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우리를 정의하는 것처럼 기억에 집착하지만, 우리를 정의하는 건 행동이다." 최근 개봉한 실사판 <공각기동대>의 대사다. 주인공 메이저(스칼렛 요한슨)는 기계로 만들어진 자신의 몸이 실험 대상이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기억조차 주입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혼란을 느낀다. 나는 인간인가 기계인가. 동료들은 그를 위로한다. "넌 달라, 인간이야." 하지만 혼란은 계속된다. 정체성 혼란은 사이보그의 숙명이다.
공각기동대 원작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진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주인공 릭(해리슨 포드) 역시 마찬가지다. 복제인간을 제거하는 임무를 맡은 릭은 자신을 의심한다. 의심의 시작은 조각난 기억 때문이다. 나는 인간인가 복제인간인가. 릭이 쫓던 복제인간 로이는 빗속에서 죽어가며 이렇게 말한다. "그 모든 기억도 이제 곧 사라지겠지. 흐르는 빗속의 눈물처럼." 기억의 소멸. 인간이 되지 못한 복제인간은 죽음을 그렇게 규정한다.
조작된 기억을 가진 나는 과연 '나'인가. 신체(의체)에 이어 뇌까지 내 것이 아니라면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결론적으로 인간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과학이 첨단으로 흐를수록 질문은 철학적으로 심오해진다. 가끔 SF 영화나 소설을 접할 때 던졌던 질문을 우리는 일상적으로 던져야 할지 모른다. 이미 곳곳에서 징후가 포착되고 있다.
최근 테슬라의 최고경영자(CEO) 일론 머스크가 뉴럴링크(Neuralink)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일단 뇌 질환 연구를 진행한다.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인간의 뇌에 칩을 심어 정보와 생각을 올리고 내려받을 수 있게 만든다는 계획이다. 뉴럴링크가 주목하는 기술은 뉴럴 레이스(neural lace. 전자그물망). 하버드대 연구팀이 2015년 네이처 나노테크놀로지에 소개한 일종의 뇌 측정 기술이다. 원리는 이렇다. 전자그물망을 뇌에 주입하면 뇌 부위에서 액체가 최대 그물처럼 펼쳐진다. 뇌세포에 자리를 잡은 그물망은 이 전기 신호와 자극을 감지한다. 전자그물망을 컴퓨터와 연결하면 정보의 업로드와 다운로드가 가능하다.
기술의 실현 가능성보다 일론 머스크가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는 사실이 더 흥미롭다. 전기자동차 대량 생산 시대를 열고, 회수해서 재활용할 수 있는 우주로켓 개발에 도전해 성공한 인물이다. 그가 민간 우주선을 이용한 인류의 화성 이주 프로젝트를 추진하겠다고 발표했을 때만 해도 '돈 많은 괴짜의 허풍'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일론 머스크는 이 목표를 향해 실제 한 단계씩 실행에 옮기고 있다.
성급한 가정이지만 만약 이 기술이 실현된다면 더는 영어 공부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뇌에 칩만 꽂으면 된다. 비행기 조종법도 누구나 익힐 수 있다. 심지어 기억이 삭제나 이식도 가능하다. 현대 뇌 과학은 인간의 기억을 뇌의 신경세포와 세포 사이 시냅스의 전기적 신호로 만들어진 패턴을 통해 만들어지고 저장된다고 가설한다. 신경세포의 전기적 패턴을 지우면 기억이 사라지고 패턴을 복원하면 기억을 되살릴 수 있다. 현대과학으로는 아직 불가능하지만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다.
공각기동대에서는 상상 속의 뇌 기술이 대거 등장한다. 인간의 정체성과 비슷한 사이보그의 영혼을 의미하는 고스트(Ghost). 유·무선으로 뇌를 연결해 다른 사람과 네트워킹하고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전뇌(Cyber brain), 전뇌와 연결된 몸의 기계장치인 의체(Shell). 영화의 부제가 ‘Ghost in the Shell’인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서 인간과 사이보그를 가르는 기준은 오직 기억뿐이다.
김대식 KAIST 교수는 나와 기억의 상관관계를 이렇게 정리한다. "나는 내 기억의 합집합이다. 기억이 존재하기에 내가 존재할 수 있고, 어제 저녁의 나를 기억하기에 오늘 아침의 나는 어제의 나와 같은 인물이란 걸 인식한다." 또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는 '나는 뇌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뇌가 곧 나이고, 기억이 곧 나의 정체성이란 얘기다. 이런 점에서 공각기동대 주인공 메이저(원작에서는 쿠사나기)의 고민은 합리적이다.
"우리를 정의하는 건 행동"이라는 메이저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기억해야 행동할 수 있다. 기억을 지우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제 잊자고 한다. 고스트와 전뇌와 의체가 지배하는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현재진행형인 세월호가 그렇고 소녀상이 그렇다. 엊그제 지난 제주 4.3사건과 최근 논란을 빚고 있는 5.18 민주화운동도 마찬가지다. 기억을 삭제하고 그 자리에 왜곡과 거짓을 삽입하려는 시도는 현재진행형이다. 행동하기 위해서는 기억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설사 행동하지 않더라도, 기억해야 인간이다.
김형석 <과학 칼럼니스트·SCOOP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