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전합 '긴급조치9호 판결', 7년만에 쓴 자기 반성문

"공무원들 '긴급조치 9호' 적용·집행으로 손해 현실화"
"긴급조치 적용해 내린 유죄판결도 국민 기본권 침해"
7년 전 대법 "대통령 정치행위" 논리로 사법부 면죄부

입력 : 2022-08-31 오전 6:00:00
[뉴스토마토 최기철 기자] 대법원이 7년만에 입장을 바꿔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 제9호'에 의한 국가배상책임을 인정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30일 A씨 등 피해자 71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원고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원고승소 취지로 판단해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되돌려 보냈다.
 
이번 사건의 쟁점은 '긴급조치 제9호' 발령행위가 불법행위인지 그리고 이를 적용·집행한 수사기관이나 법관의 직무행위가 불법행위를 구성해 국가배상책임이 인정되는지 여부였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인 7년 전 1975년 3월26일 대법원 3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도 똑같은 사안에 대한 판단에서 '긴급조치 제9호'는 위헌·무효라고 판결했다. 유신헌법 53조를 근거로 발령됐으나 요건 자체를 결여했다는 게 이유였다. 그 이전에 긴급조치 제9호는 이미 유신헌법을 포함한 헌법상 기본 원칙인 표현의 자유, 영장주의와 신체의 자유, 주거의 자유, 청원권, 학문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함으로써 국민의 기본권을 심각히 침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재판부는 "대통령의 '긴급조치 제9호' 행사는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라는 논리로 "대통령은 국가긴급권의 행사에 관하여 원칙적으로 국민 전체에 대한 관계에서 정치적 책임을 질 뿐 국민 개개인의 권리에 대응해 법적 의무를 지는 것은 아니다"라면서 "대통령의 이러한 권력행사가 국민 개개인에 대한 관계에서 민사상 불법행위를 구성한다고는 볼 수 없다"고 판결했다. 
 
문언상으로 '긴급조치 제9호' 발령과 집행을 대통령의 정치적 책임으로 제한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비판 없이 그를 따른 수사기관과 사법부의 행위 역시 책임이 없다는 논리였다. 법조계에서 조차 대법원이 해괴한 논리로 가해자인 국가와 사법부에게 면죄부를 줬다는 비판이 쏟아져 나왔다.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30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에서 '긴급조치 9호'에 대한 국가배상 판결을 선고하고 있다. 사진=대법원
 
이번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은 대통령의 법적 책임과 함께 수사기관 등 공무원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특히 법관의 책임을 정면으로 인정했다.  
 
재판부는 "긴급조치 제9호는 명백히 위헌·무효이고 긴급조치 제9호 발령으로 인한 국민의 기본권 침해는 그에 따른 강제수사와 공소제기, 유죄판결의 선고를 통해 현실화되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 경우 긴급조치 제9호의 발령부터 적용·집행에 이르는 일련의 국가작용은 ‘전체적’으로 보아 공무원이 직무를 집행하면서 객관적 주의의무를 소홀히 해 그 직무행위가 객관적 정당성을 상실한 것으로서 위법하다고 평가되고, 긴급조치 제9호의 적용·집행으로 강제수사를 받거나 유죄판결을 선고받고 복역함으로써 개별 국민이 입은 손해에 대해서는 국가배상책임이 인정될 수 있다"고 판시했다.
 
또 "긴급조치 제9호는 유신헌법상 발령 요건을 갖추지 못했고,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며, 그 목적상의 한계를 벗어나 위헌·무효"라고 재확인하면서 "이렇게 위헌성이 중대하고 명백한 이상 대통령의 긴급조치 제9호 발령행위는 객관적 정당성을 상실했다고 보기 충분하다"고 했다.
 
재판부는 이어 "대통령의 긴급조치 제9호 발령행위가 객관적 정당성을 상실했더라도 그 발령행위만으로는 개별 국민에게 손해가 현실적으로 발생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긴급조치 제9호를 그대로 적용·집행하는 추가적인 직무집행을 통해 그 손해가 현실화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정의 정권의 긴급조치 제9호의 불법책임은 결국 그를 적용·집행한 공무원의 행위로 완성됐다고 본 것이다. 
 
또 "영장주의를 전면적으로 배제한 긴급조치 제9호는 위헌·무효"라면서 "그에 따라 영장 없이 이루어진 체포·구금은 헌법상 영장주의를 위반해 신체의 자유 등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직무집행"이라고 판단, 당시 국가기관으로서의 수사기관의 책임을 인정했다. 
 
재판부는 특히 "수사과정에서 국민의 기본권이 본질적으로 침해되었음에도 수사과정에서의 기본권 침해를 세심하게 살피지 않은 채 위헌·무효인 긴급조치를 적용해 내려진 유죄판결도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긴급조치 제9호에 따라 영장 없이 이루어진 체포·구금, 그에 이은 수사 및 공소제기 등 수사기관의 직무행위와 긴급조치 제9호를 적용해 유죄판결을 한 법관의 직무행위는 긴급조치의 발령 및 적용·집행이라는 일련의 국가작용으로서 국민의 기본권 보장의무에 반해 객관적 정당성을 상실한 것"이라고 판시했다.
 
이번 판결에 대해 피해자들 모임인 '긴급조치사람들'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고 환영 의사를 밝혔지만 "'만시지탄'의 느낌을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이날 전향적 판결을 내놨지만 7년 전 패소 확정 판결을 받은 피해자들은 국가배상을 받을 수 없다. 이 때문에 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최기철 기자 lawch@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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