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도시 폭격의 역사와 우크라이나 전쟁

입력 : 2023-02-17 오전 6:00:00
우크라이나 전쟁 일 주년이 다가오고 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그 피해와 고통이 말할 수 없이 커지고 있다. 특히, 민간인 희생자만 해도 3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면서 이에 대한 국제적 비난 여론이 높다. 발전소, 병원, 학교 등에 감행되는 무차별 폭격이 전투와 관련이 없는 민간인들까지 희생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 폭격, 그리고 이로 인한 민간인 살상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전투원과 비전투원은 구분되어야 하며 전쟁 중이라도 허용되지 않는 행위가 있다는 관념은 17세기 이래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국제법 규범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목도되는 민간인 살상을 윤리적, 국제법적 관점에서만 접근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전쟁 규범의 정립에도 불구하고 현대전의 실체는 이와는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키이우와 마리우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2차 대전 당시 런던과 베를린에서 훨씬 더 끔찍한 수준으로 자행된 바 있다. 전쟁을 뒷받침하는 군수 능력 파괴를 위해 상대의 탄약 공장, 정유소 등이 공격을 받았고, 이후에는 교통 인프라 등 민간시설에 대한 직접적인 폭격이 정당화되었다. 민간인 희생자가 속출했지만, 이는 불가피한 부수 피해로 치부된 것이 현대전의 경험이었다. 
 
도시 폭격의 비극은 1945년 8월 원폭 투하에서 극에 달했다. 8월 6일 히로시마 외과 병원상공에 투하된 원자폭탄 ‘리틀 보이’는 히로시마 건물의 69%를 파괴했고, 도시 인구의 30%에 해당하는 7만여 명의 사람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일본 국민의 항전 의지를 꺾는 것”이 제1의 원칙이었던 원폭 투하는 심리적 충격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전 경고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냉전이 종식된 이후 발발한 코소보 전쟁도 마찬가지였다. 나토의 세르비아 공습은 78일간 1일 평균 452회, 총 3만 5천여 회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이로 인해 500여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그중에는 실수로 인한 오폭도 있었지만, 발전소 변압기, 방송국 등 전략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민간시설에 대한 의도적 폭격도 있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현대전은 전투 현장에서의 공방뿐 아니라 전장 너머 적국 후방의 전략적 중심에 대한 타격을 중시한다. 전쟁이 국가 총력전의 모습을 띨수록 전략 폭격의 유혹은 커질 수 밖에 없다. 끝이 안 보이는 소모전, 누적된 피해와 국내적 불만, 이런 모든 어려움을 일거에 만회하고 전쟁을 유리하게 끝내기 위해서는 군대가 아니라 상대방 국가와 국민에 대한 압박이 효과적이라고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지금도 충분히 비극적이지만 아직은 제한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도시 폭격이 병행되고 있지만, 주된 작전은 지상에서의 전술적 공방의 소모전 양상이다. 그러나 서방의 무기 지원이 확대되고 있고 전쟁의 향방은 지극히 불투명하다. 전쟁 초기 탄약과 곡사포 등 제한적 수준의 무기만이 지원되었으나, 이제는 주력 전차가 제공되고 장거리 미사일, 전투기까지 거론되고 있다. 러시아는 대대적 공습으로 보복하고 있으며, 특히 핵 사용 위협의 수위도 다시 높여가고 있는 형국이다. 핵전쟁의 그림자 하에서 치러지는 재래식 전쟁, 끝이 보이지 않는 이 소모전이 어떻게 끝날지 현재로선 가늠하기 어렵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어느 쪽이 더 오래 버틸 수 있는지가 관건이지만, 핵 확전과 전략 폭격의 재앙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서방의 딜레마이자 과제다.
 
김정섭 세종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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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