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범종 기자] 세계보건기구(WHO) 국제질병분류 11차 개정판(ICD-11) 내 게임이용장애 질병코드의 정당성이 결여됐다는 국제사회 지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진예원 이화여대 융합콘텐츠학과 교수는 18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게임과학심포지엄 '다면적 플레이어: 게임 플레이의 다양한 층위들'에서 '질병코드 도입에 대한 해외 현황 조사'를 발표했습니다.
진예원 이화여대 융합콘텐츠학과 교수가 18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게임과학심포지엄 '다면적 플레이어: 게임 플레이의 다양한 층위들'에서 '질병코드 도입에 대한 해외 현황 조사'를 발표하고 있다. (사진=이범종 기자)
해외서도 '근거 부실' 지적
국제 사회가 게임이용장애를 다루는 양상은 다양합니다. 게임과학연구원 조사 결과, 미국과 일본 등 12개국 가운데 게임이용장애를 자국 질병분류체계에 등재한 나라는 아직 없습니다.
심리학 교수 등 각국 게임이용장애 관련 전문가 중 게임이용장애 도입 논쟁이 있다고 답한 나라는 미국·일본·프랑스·핀란드·호주 등 5개국이었습니다. 확실치 않다고 답한 곳은 대만과 말레이시아였습니다. 논쟁이 없는 나라는 독일·스페인·슬로바키아·인도·중국이었습니다.
쟁점도 나라별로 다양합니다. 미국 심리학회(APA)는 게임이용장애를 공식 진단명으로 채택하는 데 신중합니다.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편람(DSM) 최신 개정판에도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상태'로 유지됐습니다.
진 교수는 "미국 내에서는 의학적 타당성과 임상 효율성에 대한 광범위한 학계의 반대 의견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이번 조사에서 실명을 밝힌 크리스토퍼 퍼거슨 스테트슨 대학교 임상심리학 교수는 게임이용장애를 '가짜 질환'이라고 비판했습니다. 크리스토퍼 교수는 특정 행동을 지나치게 하는 사람을 염려한다면, 어째서 쇼핑, 음식 중독 등 누구에게나 적용될 포괄적 '행동 중독 장애'를 만들지 않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게임이용장애는 WHO의 신뢰성을 훼손한, 심각한 실수라고도 했습니다.
핀란드에서도 과도한 병리화와 낙인효과 우려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프랑스 역시 비전문가의 과잉진단에 따른 게임이용자 낙인효과 우려가 있습니다.
그에 반해 독일에선 관련 논의가 활발하지 않은데요. 진 교수는 "독일도 대표적인 게임 산업국 중 하나인데, 전반적으로 게임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굉장히 많기 때문에 오히려 논쟁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12개국 전문가는 국가별 게임이용장애 등재 기준에서 '과학적 근거'가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는데요. 현재 ICD-11 진단 기준은 공식 질병 등재 수준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게 공통된 평가입니다. 게임이용장애를 독립적 진단으로 만든다면, 더 근본적인 문제를 간과할 위험이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사회적 낙인과 오해, 가족과 세대 간 갈등, 가정 내 불화에 대한 우려도 컸습니다.
결국 게임이용장애 등재 여부는 단순 보건 문제가 아닌, 과학적 근거와 사회적 수용, 경제적 영향을 모두 고려한 종합적 판단이 필요합니다.
진 교수는 "개인의 정신건강 문제를 넘어 가족·여가·교육·제도, 산업·경제 구조, 법·정책과 긴밀히 연결됐기에 다양한 분야 간 통합적 협력과 논의가 필수"라고 했습니다.
또 "우리가 게임이용장애를 병리화한다면 기술이나 문화, 미디어를 병리화하는 첫 번째 사례가 될 것"이라며 "우리가 인류 전체로서 내리는 첫 번째 결정이 될 것이고, 이것은 미래 세대가 유사한 결정을 어떻게 내리는지에 대해 전례를 제시하는 상황이 될 것이기 때문에 더 신중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벨리-마띠 카훌라티 핀란드 유베스큘라대 연구교수가 '게임이용장애 측정도구의 혼란'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사진=이범종 기자)
용어 혼재로 연구 오류
게임이용장애 관련 연구에서 게임과 도박 등 용어가 혼재돼 있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벨리-마띠 카훌라티 핀란드 유베스큘라대 연구교수는 '게임이용장애 측정도구의 혼란' 강연에서 "34개 고유 언어로 한 연구를 봤다"며 "도박을 연구에서 제외했다는 게 있지만, 나머지는 도박과 게임의 구분 자체가 언급되지 않았다"고 발표했습니다.
각국 언어 사용자별 게임에 대한 정의도 제각각입니다. 설문 결과, 슬로바키아어 사용자 319명 중 59%, 영어 사용자 312명 중 49%가 도박도 게임에 포함된다고 답했습니다.
벨리-마띠 교수는 "사람마다 게임과 도박을 일관성 없이 해석하기 때문에, 설문 때마다 도박을 빼달라 하면 쉽게 수정될 것 같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이날 심포지엄은 게임과학연구원과 국제디지털게임연구학회 한국지회(DiGRA 한국학회)가 공동주최했습니다. 문체부·한국콘텐츠진흥원·게임물관리위원회·게임문화재단·한국게임산업협회가 후원했습니다.
이범종 기자 smile@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