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 오후 경기 김포 애기봉 전망대에서 관람객들이 북한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이석종 국방전문기자)
[뉴스토마토 이석종 국방전문기자]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간간이 흩날리는 안개비가 적막감을 더욱 깊게 만들었던 지난 2일 오후 2시 경기 김포 애기봉 전망대. 남북이 서로를 향해 사납게 내뱉던 확성기 방송이 멈춘 한강 하구 남북이 마주한 1.4㎞ 사이 공간은 진공상태와 같았습니다.
이재명정부 출범 1주일 만인 지난달 11일 군 당국이 대북 확성기 방송을 중지하면서 한강 하구 중립수역에 어지럽게 울려 퍼지던 기괴한 소음은 사라졌지만, 소음이 사라진 진공 너머 북녘땅을 마주하고 있는 이곳에는 감출 수 없는 긴장감이 여전했습니다.
민간인 통제선 북쪽인 애기봉 생태평화공원 입구에서는 해병대 장병들이 출입하는 관광객 등을 확인하고 있었고 입구에서 전망대까지 이어진 작전도로에서는 관광객들 사이로 드물게 해병대 작전차량과 병력이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남북을 통틀어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해발 약 154m 고지에 자리한 애기봉 관측소(OP)에 오르자 만조로 물이 차오른 한강하구 중립수역 너머로 북녘땅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2일 오후 해병대 2사단 관계자가 애기봉 관측소(OP)를 방문한 국방부 출입기자들에게 전방 지형을 설명하고 있다.(사진=해병대)
고요하지만 감출 수 없는 긴장감
"애기봉 OP는 김포 전방 북한군의 동향을 감시하는 첨병의 눈이자 최첨단의 경계작전의 핵심입니다. 밤낮 구분 없이 경계작전과 관측의 임무를 수행하는 해병대 장병들은 '내가 서 있는 이곳이 조국의 최전선'이고 '내가 지키고 있는 이곳이 국민에게 가장 안전한 곳'이라는 자부심으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을 담당하는 해병대 2사단 관계자의 간략한 설명을 들은 후 관측소 내부에 있던 고배율 망원경으로 북쪽을 볼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뿌연 안개가 끼어있었지만 망원경 너머로 북한군 주둔지와 경계시설 등이 선명히 보였습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어진 능선 위에는 북한군이 대남 소음방송을 위해 설치한 검은색 확성기가 남아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사단 관계자는 "우리의 대북 확성기 방송이 중단된 이후 북한의 소음방송도 멈췄지만 언제든 다시 방송을 재개할 수 있는 상태"라며 "우리 역시 고정형 대북 확성기를 아직 철거하지는 않았다"고 설명했습니다. 상황에 따라 남북 모두 언제든 다시 서로를 향한 확성기 방송을 할 수 있는 불안정한 상황인 것입니다.
망원경 너머로 북한이 보여주기 용도로 만든 '해물 선전마을'도 보였습니다. 이 마을 주변으로 펼쳐진 야산과 농경지가 대부분인 북쪽 풍경 속에서 작업 중인 북한 주민들의 모습도 간간이 포착됐습니다. 보이는 산 너머에서는 수도권 서쪽을 겨누고 있는 북한군의 방사포가 즐비해 있고, 훈련도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해병대 관계자의 설명이 없었다면 그저 평범한 농촌의 풍경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이 관계자는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북한 지역에선 남북 단절 조치도 계속 진행 중"이라며 "산 중턱으로 길게 이어진 흙길을 지속적으로 개척하고 있는데 북한군의 전술도로인 동시에 북한 주민의 탈북 흔적을 찾기 위한 '흔적로'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2일 오후 관광객들이 경기 김포 스타벅스 애기봉생태공원점에서 음료를 마시며 북한 쪽 풍경을 감상하고 있다.(사진=이석종 국방전문기자)
커피 한잔 속 평화로운 일상
이 같은 긴장감과는 정반대의 풍경도 이곳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전 세계 스타벅스 매장 중 가장 극적인 풍경을 자랑하는 스타벅스 애기봉생태공원점. 북한과 불과 1.4㎞ 떨어진 곳에서 창밖으로 한강 하구의 느릿한 물살과 북한 풍경을 보면서 여유롭게 커피 한 잔 마실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궂은 날씨였지만 이날도 매장 안에는 관광객들로 가득했습니다. 관광객들 중에는 인근 군부대에서 단체로 온 군인들도 보였습니다. 인근 애기봉 OP에서 본 장병들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이들은 매장안 북쪽으로 난 대형 통창 앞으로 나란히 자리 잡은 테이블에 앉아 음료를 마시며 평화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위태로운 군사적 긴장과 평화로운 일상이 공존할 수 있는 건 이곳을 지키는 해병대 2사단 장병들의 노고 때문입니다. 사단의 작전지역은 서쪽 끝 인천 강화군 말도에서부터 교동도, 석모도, 강화도를 거쳐 경기 김포시까지 이어집니다. 경계작전을 담당하는 해안선 길이만 255㎞. 육군 전방 10여개 사단이 담당하는 휴전선 길이 155마일(약 250㎞)보다 깁니다. 이 지역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북한군의 침투와 국지도발에 대비하고, 한강하구 중립수역에 대한 감시와 통제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사단 관계자는 "사단의 작전지역은 서울에서부터 불과 30㎞ 떨어진 지역의 수도권으로 접근 가능한 전략적 요충지이자 해상 교통로의 핵심 관문"이라며 "다수의 섬과 수로, 한강하구 중립수역 등이 있어 작전 환경이 매우 복잡하지만 북한군 활동과 작전환경에 맞춘 체계적인 경계작전 시스템을 정립해 대비 태세를 유지하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관계자는 "북한군이 언제, 어디서, 어떠한 방식으로 도발하더라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임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상시 작전대비 태세를 확립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2일 오후 경기 김포 애기봉 전망대를 찾은 군 장병들이 스타벅스 애기봉생태공원점에 들어가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사진=이석종 국방전문기자)
멀지만 가야 할 '싸울 필요 없는 평화의 길'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일관되게 '싸울 필요 없는 평화'를 강조해 왔습니다. 취임 한 달을 막 지나는 시점에서 그 평화의 길 초입에 들어선 것을 최전방 접경지역인 애기봉 전망대 풍경으로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스타벅스 애기봉생태공원점에서 만난 관광객들은 "아직은 갈 길이 멀어 보이지만 이 대통령이 약속한 '싸울 필요 없는 평화'가 하루빨리 실현되기를 기대한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이 대통령은 3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가진 취임 한 달 기자회견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확보하며 국민의 일상이 흔들리지 않는 나라의 첫발을 뗐다"며 "접경지역 주민들의 밤잠을 설치게 했던 대남·대북 방송의 불안한 고리를 잘라낸 것을 시작으로, 평화가 경제성장을 이끌고 경제가 다시 평화를 강화하는 선순환의 길을 복원해 나가겠다"고 강조했습니다.
특히 "한·미 간 든든한 공조 협의를 바탕으로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며 "대화를 전면 단절하는 것은 정말 바보짓"이라고 관계 개선을 강조했습니다.
또 이 대통령은 "평화야말로 국민 안전과 행복의 필수조건"이라며 "강력한 국방력을 바탕으로 도발에 철저히 대비하는 동시에, 단절된 남북 간 소통을 재개하고, 대화 협력으로 한반도 평화와 공존의 길을 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어 이 대통령은 "대북 방송 중단할 때 우려는 했지만 분명히 북한이 호응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그런데 너무 빨리 호응해서 약간은 기대 이상이었고, (앞으로 남은 문제도) 하나씩 하나씩 완화해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이석종 국방전문기자 stone@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