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범종 기자] 깊은 밤, 뱀 한 마리가 한 여자의 검에 베여 스러졌습니다. 뱀의 진짜 정체는 에조치(홋카이도)에서 위세를 떨치는 사이토 공과 가면 쓴 수하들을 일컫는 '요테이 육인방' 중 하나입니다. 뱀과의 싸움에서 치명상을 입고도 죽지 않고 일어난 초인의 뒷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수군거렸습니다. "원령이 나타났다"고.
소니 인터랙티브 엔터테인먼트(SIE) 산하 서커펀치의 플레이스테이션(PS)5 독점작 '고스트 오브 요테이'가 10월2일 발매됩니다. 공동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네이트 폭스와 제이슨 코넬은 전작 '고스트 오브 쓰시마' 이후 300년 뒤의 일본을 다시 한 번 잔혹하고도 서정적으로 그려냈습니다.
사람들이 원령이라 부르는 여인 아츠는 지난 16년간 남부에서 복수의 칼을 갈았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와 쌍둥이 오빠를 무참히 살해한 요테이 육인방을 쓰러뜨리기 위해섭니다. 제작진은 외로운 늑대 아츠의 여정을 그리기 위해 퍼스트 파티로서 역량을 아낌 없이 쏟아부었습니다.
요테이산을 바라보며 말 타고 달리는 장관이 매혹적이다. (이미지=SIEK)
미경 속 처절한 복수
복수를 위해 달려온 아츠의 삶은 기구하지만 게이머가 볼 풍경은 아름답습니다. 저 멀리 솟은 요테이산과 그 아래 나부끼는 갈대와 꽃밭, 그 위를 질주하는 아츠의 모습은 일본 홍보 영상이라 봐도 될 정도입니다.
요테이를 완성하는 건 그래픽뿐만이 아닙니다.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다양한 방식이 아츠의 여정에 빠져들게 하는데요. 우선 아츠가 허리띠에 요테이 육인방의 이름을 한자로 적는 장면을 게이머가 완성해야 합니다. TV 화면에 점선으로 나타난 한자의 획을 듀얼센스 터치 패드에 따라 그리면 육인방의 이름이 새겨집니다. 이때 붓으로 천에 글을 쓰는 것처럼 미세한 진동이 손 끝을 따라옵니다.
아츠의 원수 요테이 육인방. (이미지=SIEK)
아츠는 집안의 상징 늑대 문양이 새겨진 검(카타나)을 들고 복수를 시작합니다. 하지만 다양한 무기에 맞서려면 그만큼의 장비를 갖춰야겠죠. 이도류와 대태도, 창 등 새로운 무기를 익히기 위해 각 무기의 장인을 찾아가면 이야기 진행이 수월해집니다.
이렇게 실력을 쌓으며 육인방을 하나씩 잡는 과정은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검에는 카타나로, 창에는 이도류로 대응하며 정신없이 싸운 뒤엔 육인방 중 하나와 일대일 결투를 하게 되는데요. 처음엔 양 끝에 선 두 사람을 한 화면에 잡고 상대의 가면과 증오에 찬 아츠의 얼굴을 클로즈업합니다. 이후 아츠의 검끝이 칼집에서 한 박자 쉬고 뽑히며 복수전의 시작을 알립니다.
아츠가 육인방 중 한 명과 일대일 대결을 시작하는 장면. 아츠의 살기어린 표정이 클로즈업되고 카타나를 뽑는 장면이 이어진다. 검끝이 칼집에서 한 박자 쉬고 뽑히며 긴장감이 높아진다. (이미지='고스트 오브 요테이' 실행 화면)
듀얼센스의 역할은 이때 두드러집니다. 바로 이 장면이 펼쳐지는 동안, 아츠가 메고 다니는 현악기 샤미센의 줄이 튕기며 타악기의 울림도 빨라집니다. 이 순간 듀얼센스를 쥐고 있는 양 손바닥 한가운데 샤미센 줄이 걸린듯한 진동이 전해집니다. 이 감각은 아츠의 카타나가 칼집에서 뽑힐 때의 '툭' 소리와 어울려 투지를 높입니다.
복수전의 긴장감을 높이는 데는 샤미센을 둘러싼 서사도 한몫 합니다. 아츠가 어머니와 함께 연주하며 노래한 악기가 샤미센이기 때문입니다. 요테이 육인방이 폐허로 만든 집에서 떠올린 어머니와의 추억은 복수의 여정을 위로하는 노래가 되기도 하죠. 전작에선 주인공 사카이 진이 나무 아래 앉아 시를 지었는데요. 요테이에선 아츠가 악상을 떠올려 노래를 짓습니다. 물론 이번에도 주제와 가사를 고르는 건 게이머 몫입니다. 제작진은 이렇게 서사와 전투를 한 줄로 이은 뒤, 게이머가 직접 그 줄을 튕겨보게끔 유도합니다.
에조치에 들불처럼 번진 원령의 소문은 사이토공과 수하들 귀에도 들어갑니다. 아츠는 자신의 거울과 같은 한 마리 늑대의 도움도 받고 동료도 모으며 사이토 공에게 한발씩 다가갑니다.
하지만 피 묻은 검으로 육인방 이름을 하나씩 지우던 아츠는 늑대 무리 속에서 고뇌합니다. 복수만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카타나를 내려놓고 내 곁의 행복을 쥘 순 없는 걸까. 이 작품은 원한만이 삶의 동력이던 주인공이 뒤늦게 얻은 행복마저 육인방과 함께 베는 건 아닌지, 그게 옳은 삶인지 묻습니다.
쿠로사와 모드를 켜면 흑백 영화처럼 게임을 즐길 수 있다. (이미지=SIEK)
길 찾기, 낭만과 불편 사이
고스트 오브 요테이는 전작의 낭만을 계승·발전시켰습니다. 새벽 안개를 뚫고 달리거나 달 아래 절벽을 기어오르다 보면, 신세 한탄과 복수의 다짐이 뒤섞인 곡조 하나가 등을 밀어줍니다.
온천에 몸을 담가 명상하면 체력 최대치가 올라가기도 합니다. 사당 앞에서 터치패드를 쓸어내려 인사하면 전투 기술 하나를 얻게 됩니다. 스승에게 무기 사용법을 배울 때 대나무를 베거나 물고기를 잡는가 하면, 손목 단련을 위해 붓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하죠.
긴 여정의 밀도를 높이는 장치는 그 밖에도 많습니다. 체력 회복을 위해 야영할 때 숯불로 불 붙이기, 듀얼센스를 기울여 버섯이나 생선 익히기 등입니다. 옛 집 대장간에선 무기 성능을 높일 수 있는데요. 대장장이였던 아버지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날을 벼릴 때 듀얼센스를 위 아래로 흔들어 망치질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요테이 육인방 중 하나를 잡은 뒤 검에 묻은 피로 이름을 지우는 아츠. (이미지=SIEK)
고스트 오브 요테이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일본에 대한 서양인의 동경으로 가득합니다. 주인공 일행이 신사 앞에서 손 씻고 참배하는 장면도 넣었을 정도입니다. 제작진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사무라이 영화와 스타워즈 시리즈 등의 영향을 받은 걸로 유명한데요. 전작의 감독판에 이어 '쿠로사와 모드'를 켜면 이 게임을 흑백 사무라이 영화처럼 즐길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오랜 시간 서양에 뿌리내린 일본 문화의 영향을 첨단 콘솔 게임으로 확인할 기회이기도 합니다. 게이머는 듀얼센스 진동과 실사 그래픽의 이점을 살린 전투, 미려한 일본의 자연을 강조한 연출에 무력하게 끌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요테이는 쓰시마의 단점도 그대로 가져왔는데요. 터치패드를 위로 쓸면 흰 먹선처럼 바람이 불어 목적지를 알려줍니다. 이 방식은 아름다운 풍경을 낭만적으로 부각시킵니다. 하지만 좁은 공간에선 특정 장소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화면을 이리저리 돌리다 보면 어지러워 TV를 끄게 되는데요. 바람을 뜻하는 하얀 선이 좁은 곳에서도 특정 방향을 자세히 가리키도록 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할 듯합니다.
이범종 기자 smile@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