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9일 베를린 장벽 붕괴 25주년 기념식을 장식하는 불꽃놀이가 브란덴부르크 문 상공에서 펼쳐지고 있다. (사진=뉴시스)
최근 남북 관계 전문가들은 우리 정부가 대북 구상을 발표할 때 그 무대로 독일은 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역대 민주당 계열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은 베를린과 드레스덴에서 한반도 평화 구상을 발표하면서 북한에 대화를 제안하곤 했다. 하지만 독일이 '흡수통일'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북한의 거부감이 큰 데다, 특히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23년 12월에 남북 관계를 "동족 관계, 동질 관계가 아닌 적대적인 두 국가 관계"로 규정하면서 '통일 불가'까지 선언한 뒤에는 그 거부감이 더 강화됐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독일은 우리에게 영감의 대상이자 참고 사례가 될 수밖에 없다. 한반도와 함께 분단의 양대 상징이던 독일은 "역사를 스쳐 가는 신의 옷자락을 잽싸게 잡아채", 전쟁 없이 통일을 이뤄냈으니 말이다. 통일을 국가 정체성으로 내세웠던 북한이 돌연 '통일 폐기'를 선언하고 '동족 관계'마저 부정하는, 한반도 정세에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지각변동이 일어난 상황이라는 점에서 더 그렇다.
동독은 1949년 헌법을 제정하면서, 동독과 전체로서의 독일이 동일하다는 '1민족-1국가'론을 채택했다. 이후 1957년에 '1민족-2국가' 노선으로 바꿔 국가연합을 제안했고, 1968년 헌법 개정 때 '통일 노력' 조항을 추가했다. '1민족'이므로 통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70년대 동독…'통일 불가→통일 조항 삭제→2민족론'까지
그런데 1971년에 당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가 동독과 서독은 물과 불의 관계라며 '통일 불가'를 선언하고 나섰다. 1969년에 집권한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의 '동방 정책'(Ost Politik)으로 동서독 관계가 심화되면서, 서독 내 공산주의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현실 인식과 체제 위기감이 커진 상황에서 나온, '수세적' 대응이었다고 역사는 평가한다. 급기야 동독은 1974년에는 헌법을 개정해 '통일 조항'과 민족국가 용어를 삭제했다. 1976년 당대회에서는 당 강령에서도 통일 조항을 빼고 동독에는 사회주의 민족, 서독에는 자본주의 민족이 존재한다는 '2민족 2국가 노선'을 선언해버렸다. 2023년 말 이후 북한이 행동은 이와 판박이다.
서독도 초기에는 할슈타인 원칙으로 동독의 국가성을 부정하다가, 브란트 총리 집권기인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으로 이를 폐기했다. 이후 동서독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잠정적 특수관계'라는 정책을 흔들림 없이 1990년 통일 때까지 유지했다.
김정은은 지난달 21일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도 "민주를 표방하든, 보수의 탈을 썼든 우리 제도와 정권을 붕괴시키겠다는 한국의 태생적 야망은 변한 적이 없고 또 절대로 변할 수도 없으며 적은 역시 적이라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이처럼 북한이 '적대적 두 국가'론을 고수·강화하는 가운데,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소 김원식 박사는 지난달 30일에 낸, 이슈브리프 '남북 관계 정상화와 평화 공존의 지혜: 동서독 기본조약의 경우'에서 "동서독 기본조약은 북한의 국가성 인정을 둘러싼 논란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좋은 참조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향후 남북 관계 정상화, 나아가서는 (이재명정부가 국정 과제로 제시한) 남북기본협정 체결과 관련하여 두 국가론 수용 여부, 북한의 국가성 인정을 둘러싼 논란은 일정 부분 불가피해 보인다"며 북한의 국가성 인정과 관련된 논쟁 해소 대안으로, 남북한 특수관계론 고수론과 북한의 국가성을 부정하는 헌법 조항들을 수정하자는 개헌론을 열거했다.
우선 '특수관계론 고수론'에 대해 "통일은 물론 민족 동질성 자체까지 부정하는 현재 북한의 입장을 고려할 때, 북한이 이러한 기존 논리를 수용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민족 동질성과 통일이라는 목적에 대한 남북 사이의 합의가 전제되지 않는 상황에서 특수관계론은 성립할 논리적 기반 자체를 확보할 수 없다는 인식이다.
헌법 영토 조항(제3조)과 평화통일 조항(제4조)을 바꾸자는 '개헌론'도 국민들의 정치적 합의를 기대하기 어렵다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북한, 통일 문제에 대한 우리 내부의 입장 차이와 정치적 진영화 양상을 고려할 때, 이러한 시도는 아무런 성과도 없이 결국 내부 갈등만 오히려 격화시킬 우려가 크다"는 것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노동당 창건 80주년 기념일(10월10일)을 앞둔 8일 평양 해방산거리에 있는 당창건사적관을 찾아 연설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9일 보도했다. (사진=뉴시스)
"근본 문제에 관한 동서독 간 서로 다른 견해를 훼손하지 않는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 동서독 기본조약은 북한의 국가성 인정과 통일 지향성을 둘러싼 논란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유력하고 실용적인 참조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현재 남북 관계를 고려할 때, 통일, 민족과 같은 근본 문제와 관련하여 일방에 의한 타방의 설득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고, 그렇다고 해서 탈냉전기 30년과 같이 북한 체제의 급속한 변화나 자유민주주의 체제로의 동화(同化)만을 기다리는 것도 시대착오적인 인식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서독 기본조약 전문 중 "민족 문제를 포함한 근본적인 문제들에 관한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 사이의 서로 다른 견해를 훼손하지 않는다"는 문구를 소개했다. 이를 통해 "민족 문제와 관련하여 동서독이 가지고 있는 두 견해, 즉 1민족론과 2민족론의 차이, 통일 지향성의 유지와 폐기에 대해 동서독 각각이 가지고 있는 견해의 근본적 차이를 서로 존중하는 선에서 양자 간 합의를 이뤄냈다"는 것이다. 동독과 서독은, 1민족론과 2민족론이라는 근본적 차이까지 수용함으로써 평화 공존을 성취하는 지혜를 발휘했다는 얘기다.
그는 현재 한반도 상황과 관련, "우리가 한민족의 동질성과 통일에 대한 지향을 포기해야 할 이유는 없지만, 북한이 이와 관련하여 반드시 우리의 견해를 수용해야만 공존할 수 있다고 고집할 필요도 없다"며 "우리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통일에 대한 의지를 부정하고 훼손하려고 하지만 않는다면, 우리가 북한과의 평화 공존을 거부할 이유는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때로는 공존을 위해 '합의 불가능하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합의(agree to disagree)'도 필요한 법"이라는 주장이다. 김정은의 '두 국가론'을 놓고 국내 논란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새겨볼 만한 조언이다.
황방열 통일외교 전문위원 bangyeoulhwa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