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백아란 기자] 오는 13일부터 시작되는 이재명정부 첫 국정감사를 앞두고 200여명 가까운 기업인들이 불려 나갈 것으로 예상되면서 재계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습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필두로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 등 주요 기업인들이 대거 증인으로 채택되면서 ‘기업인 줄소환’으로 기업 경영에 차질이 빚어질 것이라는 논란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특히 한미 관세 협상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기업의 역할 등을 고려해 증인 소환을 자제하자는 여야의 암묵적 합의에도 기업인 비중이 전체 증인의 과반을 넘어서면서 재계의 피로도가 높아지는 실정입니다. 이에 시민단체들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커가는 시대적 추세에 맞게 산업 현장의 문제점을 경영책임자에게 묻는 절차는 당연하다는 지적입니다.
지난해 9월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무위원회 전체회의. (사진=뉴시스)
10일 국회와 재계 등에 따르면 현재까지 파악된 국감 증인 370여명 가운데 기업인은 190명을 넘어선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이는 역대 최대치인 지난해(159명) 기록을 갱신하는 수준으로 증인 채택 절차가 모두 마무리되면 기업 관련 증인은 200명을 초과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당초 더불어민주당 지도부는 한·미 관세 협상 등 대내외 불확실한 경제 여건을 감안해 ‘기업인 증인 채택 최소화’라는 지침을 내렸지만 증인·참고인 명단에는 기업 총수들이 줄줄이 이름을 올린 상태입니다. 지난 17대 국회 국정감사 당시 평균 52명이던 기업인 증인은 18대 77명, 19대 124명, 20대 155명으로 꾸준히 증가했습니다.
재계 10대 그룹별로 보면 최태원 회장이 계열사 부당지원 등과 관련해 정무위원회 증인으로 부름을 받았고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이수기업의 노동자 집회와 책임경영과 관련해 행정안전위원회의 국감 출석을 요구받았습니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은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국감 증인으로 국회에 나섭니다. 신세계가 중국 알리바바그룹과 함께 설립한 법인과 관련해 온라인 플랫폼의 국내 소비자 정보 보호 문제를 묻는다는 차원입니다.
(표=뉴스토마토)
여기에 정현호 삼성전자 부회장은 삼성 웰스토리 부당 지원 사건과 관련해 정무위 증인으로 채택됐습니다. 정 부회장은 지난 2018년 당시 미전실 역할을 하던 삼성전자 사업지원TF장으로 일하며 삼성전자 내 급식업체 경쟁 입찰을 중단시키고 삼성웰스토리에 일감을 몰아준 데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습니다.
정무위는 또 권오성 현대위아 대표이사를 갑질 및 납품 단가 후려치기 관련 증인으로 채택했으며, 김병주 MBK파트너스 회장과 김영섭 KT 대표이사, 조좌진 롯데카드 대표이사는 ‘해킹에 의한 대규모 개인정보 유출’ 관련 증인으로 소환하기로 했습니다.
행정안전부 대상 국감에는 김동명 LG에너지솔루션 사장과 현신균 LG CNS 사장이 국가정보자원관리원 리튬이온 배터리 화재 발생과 관련해 증인으로 출석합니다. 김영섭 KT 대표, 유영상 SK텔레콤 대표, 홍범식 LG유플러스 대표는 해킹 및 개인정보 유출 사태로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증인 연단에 오릅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울산전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인공지능(AI) 글로벌 협력 기업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 밖에 이해욱 DL그룹 회장, 허윤홍 GS건설 사장, 김보현 대우건설 대표, 정경구 HDC현대산업개발 대표 등 중대재해 사고가 발생한 주요 건설사 수장들도 국토교통위원회 국감에 출석할 예정입니다.
국정감사에 기업인 출석이 늘어나면서 재계 내부적으로는 피로도가 높아진다는 볼멘소리가 나옵니다. 총수 등의 증인 출석 준비를 위해서는 법무팀, 대외협력팀 등이 전방위적으로 매달리는 데다 관련 자료 준비와 시뮬레이션 등에 막대한 인력과 비용이 소요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불출석 사유서 제출로 대응할 수 있지만 국회의 눈치를 안 볼 수 없다는 게 기업의 입장입니다. 여기에 한미 관세 협상 관련 후속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대미 투자의 키를 쥔 대기업 총수들을 줄줄이 불러 세우는 것은 1분 1초가 아까운 기업인들의 활동을 저해한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재계 관계자는 “국감이 열리면 기업인을 줄줄이 증인으로 불러놓고 서너 시간씩 기다리게 하다가 1분도 안 되는 시간을 주고 답변을 하라고 하면서 호통만 치는 게 사실이지 않느냐”며 “국감 시즌이 되면 회사 전체가 비상 체제에 돌입하는데 회장 출석이 확정시된다면 중요한 경영 업무는 뒷전으로 밀려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실제 최태원 회장의 경우 정무위 국감 출석일인 28일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CEO 서밋 개막 날이라는 점에서 뒷말이 나오는 실정입니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 샘 올트먼 오픈AI CEO 등 글로벌 기업 수장들의 방한을 성사시킨 장본인이라는 점과 함께, 해당 행사를 최 회장이 의장으로 있는 대한상공회의소가 주관하기 때문입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국정감사는 국회의 행정부 견제·감시 기능을 구현하는 핵심 수단인데 국정감사의 증인으로 재벌들을 부르는 것은 의원들이 ‘이 정도 힘이 있다’라는 걸 과시하기 위함으로 변질될 수 있다”며 “문제가 있는 기업에 대해 증인 소환을 통해 따져 물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윽박지르기 등 보여주기식 행태가 되어선 안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반면 시민단체 등에서는 기업인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고 지적합니다. 산업현장에서 발생하는 각종 사고와 관련해 경영책임자의 직접적인 책임을 묻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장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강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경영진이 국정감사를 통해 투명성을 보여주는 것은 당연하다”며 “단순히 기업 총수라는 이유로 면책을 요구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한편 기업인이 국감 증인·참고인으로 채택됐더라도 국정감사 전까지 여야 간 합의나 해당 인사의 불출석 사유서 제출 등으로 참석 여부가 바뀔 수 있는 가능성도 존재합니다. 정무위 관계자는 “증인으로 출석을 요구받았음에도 국감장에 나갈 수 없다면 국감일 3일 전까지 불출석 사유서를 제출해야 한다”며 “(최태원 SK그룹 회장이나 정현호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해선) 현재까지 접수 받은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백아란 기자 alive0203@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