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재희 기자] KB국민은행의 자체 감정평가 행위로 촉발된 금융권 관행이 수술대에 올랐습니다. 감정평가 업무 정책당국인 국토교통부는 은행들의 자체 감정평가를 불법이라고 유권해석했고, 금융당국도 이해관계자 조정에 직접 나섰는데요. 은행권의 자체 감정 평가가 전면 금지될지 타협안이 나올지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감평협회 "불법 시장 침탈"
28일 금융권에 따르면 감정평가사협회와 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KB국민은행이 참여하는 4자 협의체가 은행권 자체의 부동산 감정 평가와 관련해 최종 조정에 나설 예정입니다.
앞서 감평협회은 지난 27일 서울 여의도 국민은행 본점 앞에서 '감정평가시장 불법 침탈행위 규탄대회'를 열고 "국민은행이 감정평가사를 직접 고용해 내부 '가치평가부'를 운영하는 것은 사실상 불법 감정평가법인 운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감평협회에 따르면 국민은행의 자체 감정평가 규모는 △2022년 26조원 △2023년 50조원 △2024년 75조원으로 3년 만에 세 배 가까이 급증했습니다. 지난해 국민은행의 자체 감정평가 보수도 550억원으로 감정평가업계 1위 법인의 350억원보다 1.5배 이상 많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양길수 감평협회 회장은 "국민은행이 고액 부동산 위주로 자체 평가를 진행해 감정평가 시장을 사실상 침탈하고 있다"며 "은행이 감정평가법인 인가도 없이 '감정평가'를 수행하는 것은 명백한 위법 행위"라고 강조했습니다.
감정평가법 제5조 제2항은 금융기관이 대출 등과 관련해 토지·건물의 감정평가를 하려면 감정평가법인 또는 감정평가사에게 의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인가받지 않은 기관이 자체적으로 감정평가를 수행할 경우, 같은 법 제49조 제2호에 따라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픽=뉴스토마토)
국토부 "위법 소지" 유권해석
국토교통부도 최근 은행의 자체 감정평가를 감정평가법 위반으로 유권해석 했습니다. 국토부는 "은행이 감정평가사를 고용해 담보물을 직접 평가하는 행위는 감정평가법 위반"이라는 공식 유권해석을 내놨습니다.
금융위원회는 국회 국정감사에서 감평협 불법 감정평가 의혹에 대해 질문이 나오자 산정 방식 개선 등에 대해 관련 기관들이 합의해야 한다고 공식 의견을 밝혔습니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김용만 민주당 의원은 지난 27일 국정감사에서 "감정평가법과 은행업무 시행세칙 간의 충돌 문제로 2022년, 2023년, 2024년에도 언급된 문제"라며 "결국 시간을 끌겠다는 것 아닌가"라고 질의했는데요. 이억원 금융위원장은 "금융위 부위원장과 감정평가사협회장이 최근 면담하고 어떻게 산정 방식을 개선할지 원칙적으로 합의했다"며 "합리적인 방안이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고 답했습니다.
양길수 협회장은 "금융위의 중재로 은행권과 마주 앉아 문제 해결을 논의하게 된 점은 진전된 조치"라면서도 "협의체 구성이 끝이 아니라 금융위가 보다 적극적으로 조처해야 한다는 점을 지속해서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은행권 "자체 감정 불법 아냐"
은행권은 자체 감정이 합법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현행 은행감독업무 시행세칙 제31조는 주거용 담보물의 경우 '시세가 명확할 때에는 자체 평가를 허용한다'고 명시돼 있기 때문입니다. 시행세칙에 따라 비주택 부동산의 담보가치 산정 시 국세청 기준시가 등 공신력 있는 평가 기관의 자료를 활용할 경우 가격을 자체 평가할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모든 담보를 외부 감정평가법인에 의뢰하게 되면 건당 20만~40만원의 수수료가 발생한다"며 "결국 비용 부담이 차주에게 전가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자체 감정평가는 대출 실행 속도를 높이고, 대규모 주택담보대출 업무 효율성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라고 덧붙였습니다.
다른 관계자는 "은행의 담보물 평가는 ‘은행업 감독업무 시행세칙’에서 정한 기준에 따라 적법하게 이뤄지고 있다"며 "감정평가법에 따른 감정평가는 세칙에서 규정한 담보가치 산정 방법 중 하나일 뿐, 담보가치 산정 시 반드시 외부 감정평가를 의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습니다.
감정평가법과 은행감독 세칙의 충돌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2011년 7월부터 금융권 부동산 담보대출에 대한 담보권 설정 비용을 금융회사가 부담하도록 제도가 바뀌었고 은행들이 부동산 자체 감정에 나서면서 문제가 시작됐습니다. 당시에도 감정평가업계는 부동산 자체 감정이 본격화하면 매출이 절반 이상 급감할 것이라 우려하며 감정평가 업무 고유의 전문성과 공공성을 해친다고 반발한 바 있습니다. 이에 은행들은 감정평가 수수료 등 비용 절감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는 입장을 고수해왔습니다.
이번 금융당국의 논의 결과에 따라 오랫동안 지속해온 은행의 부동산 자체 감정평가의 지속 여부가 가려지는 만큼 결과가 주목됩니다.
감평협이 KB국민은행 자체 감정평가 행위를 문제 삼은 후 국토교통부와 금융위원회도 산정 방식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사실상 금융권 표준으로 자리 잡은 KB국민은행의 자체 시세·감정 체계가 법적 충돌과 신뢰 논란에 직면했다. 사진은 감평협 회원들이 서울 여의도 KB국민은행 앞에서 규탄대회를 하는 모습. (사진=감평협)
이재희 기자 nowhee@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