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진드기 물림으로 생긴 ‘붉은 고기 알레르기’가 사망으로 이어진 첫 공식 사례가 보고됐습니다. 겉보기에는 건강했던 중년 남성이 햄버거를 먹은 뒤 몇 시간 만에 쓰러져 숨졌고, 그 원인은 흔히 알려지지 않은 알파갈(alpha-gal) 알레르기로 확인됐습니다.
미국 버지니아대(University of Virginia) 의과대학 연구진은 학술지 <알레르기와 임상면역학 저널: 임상 실무(Journal of Allergy and Clinical Immunology: In Practice)> 12월호를 통해 이 사례를 공개했습니다. 연구진에 따르면 이는 진드기 매개 육류 알레르기로 인한 첫 사망 확인 사례입니다.
육류 알레르기의 매개로 알려진 론스타 진드기(Lone Star tick). (사진=뉴시스)
진드기가 만든 ‘지연형 알레르기’
사망자는 미국 뉴저지에 살던 47세 남성으로, 기저질환은 없었습니다. 그는 햄버거를 먹은 뒤 약 4시간 뒤 갑자기 쓰러져 사망했습니다. 부검에서도 명확한 사인이 밝혀지지 않아 사망 원인은 한동안 ‘원인 불명의 급사’로 남아 있었습니다.
전환점은 알레르기 전문의인 토머스 플래츠-밀스(Thomas Platts-Mills) 박사가 사건을 재검토하면서 찾아왔습니다. 플래츠-밀스 박사는 과거 알파갈 알레르기를 처음 규명한 인물로, 현재도 해당 질환 연구를 이끌고 있습니다. 사망 이후 보관돼 있던 혈액을 분석한 결과, 남성은 알파갈에 강하게 민감하게 반응한 상태(sensitization, 감작)에 있었으며, 검사 소견은 ‘치명적 아나필락시스(전신 알레르기 쇼크)’와 일치했습니다.
알파갈 알레르기는 론스타 진드기(Lone Star tick, 학명 Amblyomma americanum)에 물린 뒤 발생합니다. 진드기가 옮기는 알파갈이라는 당(sugar)에 면역계가 과민 반응을 보이게 되며, 이후 소고기나 돼지고기, 양고기 같은 포유류 고기를 섭취하면 알레르기 증상이 나타납니다.
특이한 점은 증상이 식후 즉시가 아니라 3~5시간 뒤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피부 발진, 복통, 구토, 설사에서 시작해 심한 경우 생명을 위협하는 아나필락시스로 진행될 수 있습니다. 플래츠-밀스 박사는 “붉은 고기를 먹은 뒤 3~5시간 후 심한 복통이 나타난다면 아나필락시스를 의심해야 하며, 일주일 이상 가려운 진드기 물림이나 이른바 ‘치거(chigger, 진드기의 애벌레)’로 불리는 유충 물림은 포유류 고기에 대한 감작을 유발하거나 악화시킬 수 있다는 의미”라고 경고했습니다.
연구진에 따르면 남성은 2024년 여름 가족과 캠핑을 다녀온 뒤 이상 증상을 처음 경험했습니다. 밤 10시쯤 스테이크를 먹고 잠든 뒤, 새벽 2시경 극심한 복통과 설사, 구토로 잠에서 깼습니다. 아침이 되자 증상은 가라앉았지만, 그는 가족에게 “생명이 위태로운 느낌”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붉은 고기 등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알파갈증후군’이 최대 45만명의 미국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힌 바 있다. (사진=뉴시스)
그로부터 약 2주 뒤, 그는 바비큐 모임에서 햄버거를 먹었고, 그날 저녁 7시37분 아들이 화장실에서 쓰러진 그를 발견했습니다. 사망자의 아내는 남편이 최근 1년간 진드기에 물린 적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여름 초 발목 주변에 12~13개의 심하게 가려운 물린 자국이 있었던 점을 떠올렸습니다. 당시 가족은 이를 독성이 거의 없는 ‘치거’ 때문으로 여겼습니다. 플래츠-밀스 박사는 미국 동부 지역에서 치거로 오인되는 사례 상당수가 실제로는 론스타 진드기 유충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술·운동·꽃가루도 위험 상승 요인
연구진은 이 남성의 치명적 반응이 여러 요인에 의해 증폭됐을 가능성도 제기했습니다. 햄버거와 함께 마신 맥주, 당시 유행하던 돼지풀 꽃가루, 그날의 신체 활동, 그리고 평소 붉은 고기를 거의 먹지 않았던 식습관 등이 면역 반응을 더욱 극단적으로 만들었을 수 있다는 분석입니다.
플래츠-밀스 박사는 사슴 개체 수 증가와 함께 론스타 진드기의 서식 범위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며 의료진과 일반인의 각별한 주의를 당부했습니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붉은 고기 등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알파갈증후군'이 최대 45만명의 미국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이번 사례가 미국에서 발생했다고 해서 한국이 안전지대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국내에는 론스타진드기처럼 알파갈 알레르기를 직접 유발하는 것으로 확인된 종은 흔치 않지만, 사람을 무는 진드기 자체는 매우 널리 분포해 있기 때문입니다. 질병관리청과 국내 연구에 따르면, 한국에서 사람과 환경에서 채집되는 진드기의 대부분은 작은소피참진드기로, 농촌·산지·공원 등 일상적인 야외 공간에서도 쉽게 노출될 수 있습니다. 이 진드기는 이미 중증열성혈소판감소증후군(SFTS)을 옮기는 매개체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국제 알레르기 학계에서는 미국과 다른 진드기 종이라 하더라도 알파갈(alpha-gal)에 대한 면역 감작이 이론적으로 가능하다는 논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일본 등 아시아 일부 국가에서는 붉은 고기 섭취 후 수시간 뒤 심각한 알레르기 반응이 나타난 사례들이 보고돼왔습니다. 버지니아대 연구진은 “지연형 알레르기라는 특성 때문에 진단이 늦어질 수 있다”며, 식후 몇 시간 뒤 나타나는 복통과 구토를 단순 소화 문제로만 넘겨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경고는 우리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
임삼진 객원기자 isj2020@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