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년 동안의 근사했던 시간, 고마웠어요 척!(39 Great Years! Thanks, Chuck!)”
영화 <척의 일생>은 알 수 없는 의문으로 시작한다. 인터넷이 끊기고 캘리포니아가 지진으로 사라지는 중인 미국, 원자력발전소가 또다시 바다에 잠긴 일본, 기근에 시달리는 유럽 등 전 세계는 멸망의 징후들 속에서 혼란스러운데 옥외광고판과 TV, 라디오에서는 온통 ‘척’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광고만 나오는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척에 대해 묻지만 그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체 척은 누구이며 세상은 왜 이 지경이 되어가고 있는가.
3막에서 제기된 의문은 2막에서 1막으로 영화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풀린다. 척은 영웅이거나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다. 평범한 회계사였고, 거리에서 한 드러머의 연주에 맞춰 즉흥적으로 춤을 추던 사람이었으며, 일곱 살에 부모를 여읜 뒤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자라난 아이였다. 그리고 조부모가 출입을 금지하던 옥상방에 대해 오랫동안 호기심을 가졌던 소년이었다.
“힘든 건 뭔가 하면 말이다 척, 기다리는 거야.”
할아버지는 어린 손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죽을 것을 알고 그때를 기다리면서 생을 살아내는 일. 할아버지는 그 기다림이 힘들다고 했다. 충분히 그럴 법하다. 내가 언제 죽을지를 안다면 남은 시간이 고통스러울 수 있다. 두려움에 떨며 온 시간을 허무 또는 무기력과 씨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반대의 사람도 있다. 마지막 순간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사람. 그것은 포기일 수도, 순응일 수도 있겠다. 뭐가 됐든 그냥 잊고 사는 것이다. 그것도 열심히. 척이 그랬다. 마침내 열린 옥상은 ‘비밀’을 알려주었지만 척은 개의치 않았다.
그건 척에게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바로 춤이다. 이것은 재능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춤의 본능을 말하는 것이다. 춤을 출 때 몸이 느끼는 감각과 그 감각으로 충만해진 영혼에 대한 것이다. 척의 그 본능은 ‘스텝 좀 밟는’ 할머니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애초에 그에게 춤의 DNA가 있었고 생의 순간순간 그가 자신의 DNA를 잘 활용한 덕이기도 하다. 그가 젊었기에 가능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일찍 자신의 마지막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죽음은 존재의 가능성’이므로 그는 예언된 자신의 죽음을 통해 생을 더욱 풍요로운 가능성들로 채웠을 것이다. 그래서 ‘39’라는 숫자보다 ‘Great Years’가 중요한 것이다.
스티븐 킹의 동명 소설 원작에 톰 히들스턴이 주연을 맡은 <척의 일생>은 주인공 척의 삶을 바라보며, 종말을 앞둔 세계라는 상황을 통해 삶의 의미를 되묻는 이야기다. (사진=워터홀컴퍼니)
겨울을 지나면서 부고 소식이 잦다. 이제는 매해 겨울을 이별의 시기로 받아들이게 된다. 늙어가는 사람들의 공통된 감정일 것이다. 죽음이 가깝다는 걸 절감할수록 한 번뿐인 인생을 최대한 즐기는 게 우리가 태어난 이유라는 걸 깨닫게 되는데도 사는 게 점점 재미없다는 푸념을 많이 듣게 된다. 필자 역시 다르지 않다.
우리가 늙어가며 느끼는 무료함은 어쩌면 우리 우주의 팽창이 멈췄다고 착각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우리가 우리 안의 우주를 너무 일찍 폐쇄해버리는 것이다. 더 이룰 성취나 업적은 없어지고 대단한 사건도 벌어지지 않는 늙음의 시간 속에서 우리의 감각은 점점 무뎌지는 게 사실이다. 새로운 자극과 경험 없이 우리의 우주가 여전히 작동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답은 다시 척의 '춤'으로 돌아간다. 늙어감의 재앙은 육체의 쇠락이 아니라, 내 안에서 들려오는 리듬에 귀를 닫아버리는 것이다. 우리 안에도 춤의 DNA가 있고 무료한 일상의 끝자락에서도 여전히 음악은 울리고 있다. 귀를 열고 손을 잡으면 된다. 흥겨운 몸으로 척은 계속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물을 것이니. “쉘 위 댄스?(Shall we dance?)”
내 대답은 이것이다. “예스!”
이승연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