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상한 스승, 전수안"..여성권익·진보가치 향한 '한길'

입력 : 2012-07-10 오후 7:15:48
[뉴스토마토 김미애기자] "교수님은 제자들에게 언제나 따뜻하고 자상한 스승님이셨어요. 성적이 떨어진 제자의 고민상담도 들어주셨죠. 연수원을 졸업한 이후 오랜 만에 만난 저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시던 그 분의 모습이 기억나네요."
 
서울고법의 공보관인 오용규 판사(40·28기)는 연수원생이던 시절 가르침을 받았던 전수안 대법관(60· 8기)을 '소탈한 교수님'이라고 회고했다. 1997년부터 3년여간 사법연수원 교수로 재직했던 전 대법관은 수많은 법조인 후배들을 양산해낸 교육자이기도 하다. 
 
여성으로는 사상 두번째 법원장과 대법관을 지낸 전 대법관은 무엇보다 '여성 권익보호'에 앞장선 법관으로 평가받는다.
 
서울고법 형사부 재판장으로 있던 지난 2004년 전 대법관은 윤락업소 취업을 미끼로 20대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직업소개소 직원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1심은 피해자 증언에 신빙성이 없다며 강간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었다.
 
'성폭행 피해자에게 왜 상처가 생길 정도로 더 심하게 반항하지 않았는지를 탓하면서, 상처가 없어 성폭행당한 것은 아니었다고 본 것은 잘못'이라는 게 유죄 선고의 이유다.
 
당시는 '반항의 정도', '상처' 등 피해 여성이 성폭행 상황을 입증해야만 유죄가 선고되던 시절이었다.
 
2005년에는 연인 사이였던 제자에게 잔인한 폭행과 성폭행을 일삼고 이를 동영상 카메라에 담은 고교 교사에 대해 피해자의 고소 취하에도 불구하고 실형 3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당시 항소심 재판장이었던 전 대법관은 "범행 수법이 매우 잔인하고 이로 인해 김씨가 입은 정신적, 육체적 피해가 매우 커 죄질이 중하다"고 밝혔다.
 
단지 재판 뿐 아니라, 공익활동에도 열심이었다. 2001년여성부 남녀차별개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법원 내 여성법학회 발족과 여성법 강좌 개설에 기여하기도 했다.
 
 
10일 퇴임에 맞춰 낸 퇴임사에서 양성평등의 가치를 유난히 강조한 것도 그가 걸어온 길에 비추어 보면 자연스럽다.
 
그는 여성법관들에 대한 당부에서 "언젠가 여러분이 다수가 되고 남성법관이 소수가 되더라도, 여성대법관만으로 대법원을 구성하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후임으로 제청된 대법관 후보자 4명이 그대로 임명될 경우 대법관 13명 가운데 여성은 오직 1명만 남게 된 상황을 질타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법관의 비율과 상관없이 양성평등하게 성비의 균형을 갖추어야 하는 이유는, 대법원은 사법부의 심장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전 대법관에게 따라붙는 또 다른 '꼬리표'는 '독수리 5형제'다.
 
최초 여성대법관인 김영란 전 대법관과 지난해 퇴임한 이홍훈, 김지형, 박시환 전 대법관 등과 함께 진보적 가치와 소수자의 권리보호에 앞장선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실제 전 대법관은 고위법관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국가보안법 적용의 남용을 경계하고 사법부의 과거사 반성을 촉구하는 등 두드러진 개혁성향을 보여왔다.
 
2005년에는 '사법부 과거사 청산’과 법원개혁 등을 요구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또 국가보안법 이적표현물 관련 조항이나 통신비밀보호법 감청 관련 조항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등 대법관으로 재직하며 유달리 소수의견을 많이냈다. 
 
대법관 임명을 위한 인사청문회에서는 독재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지난 1986년 건국대 점거농성사건 때 학생들의 구속영장을 선별적으로 기각했던 것이 쟁점이 되기도 했다. 전 대법관은 당시를 회고하며 "용기가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불이익이 없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고 털어놨었다.
   
그는 퇴임사에서 시인 문정희의 시 '내가 한 일'을 인용하며 34년 법관 생활을 마무리하는 소회를 대신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만 싶습니다. / 강물을 안으로 집어넣고 / 바람을 견디며 / 그저 두 발로 앞을 향해 걸어간 일 / 내가 한 일 중에 그것을 좀 쳐준다면 모를까마는'
 
전 대법관은 이제 자유인으로 돌아가지만, 그가 34년간 걸어온 길은 분명 '남들이 좀 쳐주는' 수준을 넘어 우리 사법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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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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