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 가을의 단상(斷想)

입력 : 2016-09-19 오전 6:00:00
정말 길고 긴 더위의 터널이었다. 기상청 보도에 따르면, 올여름은 108년 만에 가장 더웠다고 한다. 역대 최고로 긴 폭염과 열대야, 그리고 가장 적은 강수량은 우리에게 엄청난 인내를 강요했던 2016년 여름의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이로 인한 수산양식장의 수많은 어패류와 농축산물의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의 체감온도를 상승시키는 데 일조하여, 가슴 아픈 통계들을 낳고 말았다. 또한 우리 사회에 일어난 각종 사건 사고 소식 등을 접하며 우리는 더, 혹서의 계절을 이겨내야만 했다. 반면에 더위를 피해 시원한 영화관으로 몰려간 여름 성수기 관객 수가 사상 최대였다는 보도는 올 여름이 만들어 낸 또 하나의 기록이었다.   
 
정말 지긋지긋했던 더위가 물러갔을까. 직접 느끼고 싶었다. 가을 옷차림으로 오랜만에 집 앞에 있는 중랑천 산책길을 걸었다. 제법 선선한 바람이 나를 맞이해주었다. 여름 내내 숨죽이고 있던 풀벌레 소리가 길가에까지 나와서 뛰어다녔다. 산책 나온 사람들이 그 풀벌레 소리를 주워 담아가고 있었다. 허기진 중랑천 물소리를 쪼아 먹던 두루미 몇 마리가 어둠을 디디고 서 있었고, 강 건너편 하늘에는 전철 소리에 놀란 구름들이 그림자를 길게 펼쳐 놓고 있었다. 초안산이 그 그림자의 일부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최근 비가 거의 오지 않았던 탓인지, 중랑천 일부 지역은 바닥을 드러낸 곳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잡풀들이 그 바닥을 메우며 강물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중랑천에는 평상시 잉어랑 붕어, 버들치 등 제법 많은 물고기들이 유영(遊泳)하고 있었는데, 그 물고기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더위를 피해 어디론가 몸을 피했다면, 이제는 서서히 나타날 것이다. 풍부한 강수량으로 그 많은 물고기들을 불러와 예전의 넉넉함을 찾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전거 벨소리와 불빛이 어둠을 깨우며 스쳐지나갔다. 산책로 주변에 설치된 농구대에서 젊은 혈기들이 땀을 흘리며 농구를 즐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의 앞날을 짊어질 청년들의 땀방울에서 건강한 미래가 읽혀지는 것 같았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이 여름 내내 침묵으로 버텨온 갈대들 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어느 시인의 시처럼, 저 갈대들 올 여름, 속으로 속으로 많이 울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곧 저 갈대들이 자라서 예전처럼 이 일대를 갈대숲으로 바꾸어 놓을 것이다. 그런 상상을 하니 마음이 더 시원해진다. 갈대처럼 올 여름 폭염에 속으로 울었던 사람 많았을 것이다. 이 가을은 그런 자들에게 어떻게 다가설까. 저 멀리 보이는 삼각산 단풍들도 이 시각이면 붉어지는 연습을 하리라. 속으로 붉어지는 연습일 것이다. 그래야 단풍이 더 붉어지리라. 더위를 잘 이겨내면 단풍이 더 붉어진다고 했는데, 이제 곧 삼각산이 붉게 물들어 우리들에게 위로의 문장을 듬뿍 선물할 것이라 생각하니 단풍의 계절이 더 기다려진다.  
 
이 다양한 풍경 앞에 선 우리들도 올 가을에는 더 붉게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으면 한다. 사람들의 손금에 붉은 선 하나를 긋기 위해 바람이 다가온다. 시원한 바람이다. 살아있기에 맛볼 수 있는 바람 아닌가. 다만, 이 풍경에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날씨가 흐린 탓에 바람 쐬러 나오지 않는 별들이 마음에 걸린다. 달이 나오지 않은 것도 옥에 티다.      
 
이렇게 우리와 더불어 살고 있는 수많은 존재들이 폭염을 떨쳐내고 있다. 다시 활기를 찾고 있다. 무더위를 이겨낸 이들의 생명력은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수확의 계절 가을에, 우리들은 과연 무엇을 꿈꾸고 있을까. 들판에는 풍년을 알리는 황금물결이 넘쳐나길 기대한다.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에게는 원하는 직장이, 결혼을 꿈꾸는 청춘에게는 행복한 가정이, 대학입시를 앞둔 수험생에게는 최선의 결과가 각각 주어졌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온갖 어려움을 겪고 살아와 지금은 정년을 마친 고령화 세대와 이제 막 정년을 맞고 있는 베이비부머 세대에게는 걱정 없이 살아갈 비전이 주어졌으면 좋겠다. 나라경제도 녹록치 않다. 조선 · 해운업의 불황, 사상 최대의 임금체불 등 우울한 소식이 쉬 가시지 않고 있다. 사드 · 북핵 문제와 관련하여 국내외적인 갈등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폭염을 이겨낸 가을처럼, 이 모든 것들이 해결의 실마리를 푸는 계절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희망이 담긴 뉴스를 기다려본다. 가을 하늘처럼 높고 푸르른 삶이 코스모스 향기처럼 우리들의 일상으로 번지고 있다는 그런 뉴스 말이다.    
 
오석륜 시인/인덕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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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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