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 피해자 답지 않다고 가해자 무죄? 대법 "법리에 안 맞아"

입력 : 2020-11-16 오전 10:28:16
[뉴스토마토 최기철 기자] 강제추행 피해자가 피해자답지 않다며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대법원이 법리에 맞지 않다면서 뒤집었다. 대법원은 "범행 후 '마땅히 그러한 반응을 보여야만 하는 피해자'로 보이지 않는 사정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함부로 배척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대법원 3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A씨에 대한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다시 심리하라며, 사건을 창원지법으로 되돌려보냈다고 16일 밝혔다.
 
대법원 청사 전경. 사진/뉴스토마토
 
편의점 대기업 대리와 점주
 
법원에 따르면 A씨는 대기업 편의점 브랜드 개발팀 대리였다. 피해자 B씨는 유부녀로, 2017년 3월 경남 진주시에 이 대기업이 관리하는 편의점을 개업했다. B씨에게 호감을 느낀 A씨는 업무를 이유로 B씨의 편의점을 다른 편의점에 비해 자주 찾았고 전화 연락도 잦았다. B씨 가족이 무슨 일을 하는지, 학창시절에는 어떻게 생활했는지, 편의점 전에는 무슨 일을 했는지 등을 물어봤다. B씨는 적성검사 차원에서 물어본다고 하니 그러려니 했다.
 
같은해 4월24일 오후 3시쯤, A씨는 B씨가 편의점에서 홀로 근무하고 있는 것을 보고 B씨가 있는 계산대 안쪽으로 들어갔다. 서류를 보여주면서 업무에 관한 설명을 하던 A씨는 갑자기 오른손으로 B씨의 머리를 만졌다. B씨가 밀어내면서 거부했지만 A씨는 멈추지 않았다. 1시간 35분쯤 뒤 A씨는 계산대 위에 자신의 노트북을 올려 놓고 B씨를 의자에 앉힌 뒤 뒤에서 B씨를 안았다가 갑자기 B씨의 목을 세게 껴안은 뒤 오른쪽 얼굴에 키스했다.
 
1심, 벌금 400만원 선고
 
A씨는 B씨를 강제추행 혐의로 고소했다. A씨는 1심에서 서로 호감을 가지 관계고, B씨가 이혼 준비 중이었기 때문에 불리해질 것을 우려해 허위로 고소했다고 주장했다. 1심은 당시 상황이 찍힌 편의점 내 CCTV를 근거로 A씨에게 유죄를 인정, 벌금 400만원을 선고하고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40시간을 명했다. A씨가 무죄를 주장하며 항소했다.
 
2심은 무죄를 선고했다. 우선 1심에서 유죄 근거로 채택한 B씨의 진술과 CCTV를 믿을 수 없다고 봤다. 특히 CCTV에서 B씨가 신체접촉을 피하려고는 했으나 종종 웃었고 추가 접촉이 가능한 범위에서 피했기 때문에 의사에 반한 강제접촉으로는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피해자의 모습은 그 전의 추행행위가 있었던 사람들의 태도(피해자 다움)로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2심 무죄 "CCTV 유리한 부분 미리 확인"
 
또 강제추행 당시 웃은 이유에 대해 "아마 그때 놀래 헛웃음 나왔던 것 같다"는 말을 근거로 B씨가 사건 발생 직후 CCTV 영상을 돌려보면서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을 미리 확인한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아울러 "피해자가 외도 등을 의심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면서 "이혼하는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자신의 책임을 덜고자 신체접촉을 강제추행으로 신고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A씨의 주장대로 허위고소 가능성을 언급한 것이다. 재판부는 A씨가 사건 당시 꾸며내기 어려운 상황들까지 구체적으로 진술하고 B씨와는 업무 외적으로도 많은 대화를 나눴다고 인정했다.
 
대법원은 2심 판단을 모두 뒤집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성폭행 피해자의 대처 양상은 피해자의 성정이나 가해자와의 관계 및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판시했다. 따라서 "개별적, 구체적인 사건에서 성폭행 등의 피해자가 처해 있는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가볍게 배척하는 것은 정의와 형평의 이념에 입각해 논리와 경험의 법칙에 따른 증거판단이라고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 판단은 확립된 대법원 판례다.
 
대법 "피해자 답지 않다고 진술 배척해선 안돼"
 
또 "범행 후 피해자의 태도 중 '마땅히 그러한 반응을 보여야만 하는 피해자'로 보이지 않는 사정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함부로 배척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이어 "원심도 인정하는 것처럼 사건 당시 피해자는 피고인의 신체접촉을 피하거나 거부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으며, 이는 업무상 정면으로 저항하기 어려운 관계에 놓인 피해자의 입장에서 가능한 정도로 피고인에게 거절의 의사로서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 볼 여지도 있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피해자의 진술은 일관되어 있음에 비해, 피고인의 진술은 피해자와의 의사합치를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변경되어 왔다"고 지적했다. 재판부 지적대로 A씨는 B씨와의 관계에 대해 경찰 수사시 '피해자가 평소 일방적으로 스킨십을 했다'고 진술했다가 검찰 수사시에는 '장난삼아 스킨십을 하는 관계였다'고 진술했다. 1심에서는 '피해자가 고백을 수차례하고 스킨십을 하는 관계로 발전했다'고 진술했다.
 
사건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경찰 수사시 "고개를 돌리다가 입술이 부딪쳤는데 피해자가 지나치게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 짜증이 나서 피해자의 목을 졸랐다"고 진술했으나 10여일 후 작성한 진술서에서는 "피해자를 살짝 안아주듯 했다"고 주장했다. 2심인 원심에서는 "20초 정도 서로 안고 있었다", "피해자의 볼에 입술이 스쳤고, 원하시는 대로 진짜 해드리겠다고 말한 후 키스를 했다"고 진술했다.
 
 
최기철 기자 lawch@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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