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칼럼)진상의 나라

입력 : 2025-04-21 오전 6:00:00
오래 알고 지내던 지인이 가게를 차렸다. 지긋지긋하다던 ‘회사생활’을 때려치우고 프랜차이즈 업장을 연 지도 1년 좀 넘었다. 집에서 거리가 꽤 있는 데다,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신없을 것이라는 핑계로 찾지 않다 최근 가게를 들렀다.
 
많이 수척해 있었다. 직장 다닐 때는 목소리도 걸걸하고 자신감 넘치던 양반이 여전히 사람 좋은 웃음만 빼놓곤 여러모로 기가 꺾인 듯 해 안쓰러웠다.
 
물론 제일 큰 고민은 모든 자영업이 그렇듯 매출이었다. 그나마 버티던 장사는 지난해 12월 비상계엄 소동 이후 카운터펀치 여러 대를 맞은 듯 정신을 못 차린다고 푸념했다.
 
주말 저녁인데도, 업장은 한산했고 TV에서 나오는 소리만 귀에 왱왱거렸다. 장사가 곤욕을 치르는데, 더욱 정신줄을 놓게 만드는 건 ‘진상’이라고 했다.
 
회사 다닐 때 접했던 진상은 양반급이라고 했다. 드라마 미생에 나왔던가. ‘직장은 전쟁터지만 밖은 지옥’이라고. 매출이 오르지 않아 힘든 것은 어떻게든 이 악물고 버틸 수 있을 것 같은데, 지옥 같은 진상 접하면 하루 종일 우울함에서 헤어나지 못한다고 한탄했다.
 
없는 날이 이상할 정도로 ‘1일 1진상’은 기본에 상상을 초월하는 진상짓에 처음 많은 고생을 했다고 옅은 웃음을 지었다. 매장, 배달 가리지 않고 ‘기묘하다 못해 신묘한 진상질’에 혀가 몇 번이나 빠진 줄 모르겠다고 했다.
 
목소리 높이다 통하지 않으면 남편, 시댁 노인들까지 총출동하는 ‘떼진상’은 기본. 배달 진상은 전가의 보도인 소비자보호원 고발을 줄기차게 외친다. 자영업자들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와 검찰청이 정확하게 뭐하는 곳인지 알쏭달쏭 하지만, 소비자보호원은 하도 많이 협박성으로 들어서 ‘진상 구제처’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서울시내 한 음식점 골목이 2월25일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진=뉴시스)
 
진상과 대통령
 
진상의 유래는 크게 두 가지다. 쌀로 모든 세금을 내는 조선시대 대동법 이전 지방 특산물은 공납으로 조정에 ‘진상’을 해야 했다. 지방할당제로 떨어진 진상품은 백성의 고혈을 쥐어짰다. 진상이 얼마나 가혹했던지 ‘진상짓’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다른 하나는 그런 짓을 일삼는 자를 일컬어 ‘진짜 상놈’을 줄여 진상이라 일컬었다는 설이 있다.
 
어쨌든 유구한 역사를 지닌 진상은 바퀴벌레처럼 끈질긴 생명력으로 21세기 선진 대한민국에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예전이라고 없었겠냐만, 요즘 들어 더욱 진화하는 진상들의 행패에 가뜩이나 장사 안 되는 자영업자들의 가슴만 날마다 멍들고 있다. 오죽하면 ‘아프니까 사장이다’는 말까지 생겼을까.
 
더욱 포악해지는 진상들의 행태에 지인은 곰곰이 생각했단다. 왜 그럴까. 스스로 답을 냈단다. ‘왕이라 하니 왕인 줄 알고 돈을 낸다는 우월적 지위를 악용해 그렇게 해도 아무 말 못 할 것이라는 약자로 판단한 자영업자에 대한 화풀이. 목소리 높여 우기면 공짜나 덤을 얻을 수 있다는 거지근성.’
 
그런데 마지막 해석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하기사, 현대판 실제 왕인 대통령 내외가 통치 기간 내 진상짓을 서슴없이 하고, 쫓겨난 지금도 하는데, 일반 백성이 부끄러울 리가 있나. 잘못인 줄 알면서도 끝까지 서로 우기는 여당이나 야당이나 정치가 ‘진상 교과서’인데, 동네 진상이 안 배우면 그게 이상하지.”
 
오승주 공동체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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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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