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경험과 환경은 뇌의 인지 능력 발달과 관계가 있다. (사진=Pexels)
[뉴스토마토 서경주 객원기자] 뇌의 백질은 신경세포(뉴런)의 축삭(axon)이 모여 있는 부분입니다. 축삭은 흰색의 지방질로 된 절연 물질인 미엘린(myelin)에 감싸여 있습니다. 미엘린이 흰색을 띠기 때문에 ‘백질(white matter)’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초고속 정보통신망에서 광섬유가 흰 절연체에 싸여 있는 것과 같습니다. 백질은 뇌의 여러 영역이 서로 소통하면서 언어, 기억, 감정, 운동 조절 등에 영향을 미칩니다. 백질이 잘 발달하면 학습 속도, 집중력, 문제 해결 능력 등이 향상됩니다.
어린 시절의 경험이 뇌의 형성과 기능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미국 하버드대, 예일대, 영국 케임브리지대의 신경과학자와 정신의학자들로 구성된 연구진은 ‘ABCD 연구’ 데이터를 활용해 9세와 10세 아동 9082명(여아 4327명)의 뇌를 분석했습니다. 이들은 재정적 어려움이나 지역사회의 안전성 같은 다양한 환경 요인이 뇌의 백질 뇌의 여러 영역을 연결하는 신경 회선의 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그것이 아동의 인지 능력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밝혀냈습니다.
2015년 미국 국립보건원(NIH)의 자금 지원으로 시작된 ‘ABCD 연구’는 미국 아동의 대표 집단을 대상으로 한 최대 규모의 종단적 뇌 발달 연구입니다. 연구진은 참가자와 그 부모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해 가정환경, 가구 소득, 부모의 교육 수준 등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고, 참가자들이 9세 또는 10세가 되었을 때 뇌 속 수분의 움직임을 측정하는 자기공명영상(MRI) 촬영을 진행했습니다. 이때 나타난 신호의 강도를 통해 연구자들은 백질 섬유다발의 조직이 얼마나 튼튼하고 잘 정돈되어 있는지, 그리고 손상이나 퇴화의 징후가 있는지 추론할 수 있었습니다.
외상 경험과 사회적 취약성이 뇌에 미치는 영향
이번 연구를 주도한 하버드대학교의 뇌과학자이자 브리검앤위민스병원(Brigham and Women’s Hospital) 임상의 소피아 카로자(Sofia Carozza) 교수 연구팀은, 뇌 전체에 걸쳐 73개의 백질 경로의 질이 아동의 초기 경험과 관련된 ABCD 데이터를 분석했습니다. 여기에는 가정의 재정적 어려움, 부모의 약물 남용 등 아동이 성장 과정에서 겪을 수 있는 10가지 역경(adversity) 지표와 부모의 교육 수준, 지역사회의 안전 등 역경을 상쇄할 수 있는 7가지 보호 요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연구진은 뇌 영상 촬영 이후 2, 3년 뒤에 아동들의 언어 및 수학 능력을 평가했습니다.
연구진은 출생 당시 체중을 제외한 모든 변수가 뇌 백질 구조 형성에 일정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백질 저하의 두 가지 주요 요인은 외상 경험과 사회적 취약성 지표였습니다. 이 사회적 취약성 지표에는 사회·경제적 지위, 주거 환경의 질, 교통 접근성, 기타 지역사회 특성이 포함됩니다. 다시 말해, 아동이 더 많은 외상을 겪고 더 높은 사회적 취약성에 노출될수록 뇌 백질의 질이 낮아졌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백질의 질적 저하는 후속 조사에서 언어와 산술 능력 저하와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이번 연구에 참여하지 않은 휴스턴대학교의 발달심리학자 요한나 빅(Johanna Bick)은 “이 정도 규모와 범위의 연구라면 아동의 인지 발달에 있어 사회적 환경을 무시할 수 없다는 점을 시사한다”면서 이는 분명히 “학업 성과를 설명하는 메커니즘”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카로자 교수는 이번 연구 결과가 가정뿐만 아니라 “가정 외부에 존재하는 광범위한 인간관계와 사회적 경험들이 아동의 발달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고 말했습니다.
이번 연구 결과가 다른 나라 아동들에게도 유사하게 나타날 것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습니다. 또한 공동체 중심 문화가 미국보다 더 강한 사회에서는 커뮤니티 네트워크 같은 요소들이 환경과 아동의 백질 발달 간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향후 연구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정책적 시사점: 아동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 필요
카로자 교수는 이번 연구가 지역사회의 유대감 강화나 개별 가정에 대한 지원을 통해 아동의 뇌 발달을 촉진할 수 있는 공공 부문의 개입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설명합니다. MIT 맥거번 뇌 연구소(McGovern Institute for Brain Research)의 신경과학자 존 가브리엘리(John Gabrieli)는 “이러한 연구 결과를 실제 정책으로 전환하는 일은 쉽지 않다”면서도, “저소득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이러한 불리함에 압도되지 않도록 돕는 사회적 정책이나 실천 방안을 고민하는 것은 충분히 동기부여가 되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번 연구 결과는 미국 과학 아카데미 회보(PNAS) 최근 호에 발표되었습니다.
◇아동 두뇌인지 발달(ABCD) 연구에서 제시한 10대 역경(Adversity)
1. 가정의 경제적 어려움: 기본 생활비 부족, 식량 불안정, 경제적 스트레스 등
2. 부모의 약물 또는 알코올 남용: 부모가 약물이나 알코올 등을 과도하게 사용하는 경우
3. 가정 내 폭력 또는 학대 경험: 신체적, 정서적, 성적 학대 또는 방임 등
4. 부모의 정신 건강 문제: 우울증, 불안장애 등 부모의 정신질환
5. 이혼이나 별거 등 가족 구조의 변화: 부모의 이혼, 별거, 재혼 등 가족 내 불안정성
6. 가정 내 갈등 빈도: 부모 간 또는 부모-자녀 간 지속적인 다툼이나 갈등
7. 양육자의 부재: 부모의 사망, 장기 출장, 교도소 수감 등으로 인해 양육자와 장기간 떨어져 있는 경우
8. 주거 불안정: 빈번한 이사, 홈리스 상태, 열악한 주거 환경 등
9. 사회적 소외 또는 차별: 인종, 성별, 언어, 장애 등을 이유로 한 차별 경험
10. 지역사회의 역경: 지역사회의 재난, 폭력, 범죄 등 부정적인 환경
◇ABCD 연구에서 제시한 7대 보호 요인 (Protective Factors)
1. 양육자의 교육 수준: 부모 중 한 명 이상이 고등교육 이상을 받은 경우, 자녀에게 더 많은 언어 자극과 학습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음
2. 가구 소득 수준: 경제적으로 안정된 가정은 자녀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키고 스트레스 수준을 낮출 수 있음
3. 양육자의 긍정적 양육 태도: 아이에게 애정, 지지, 일관성 있는 규칙 등을 제공하는 양육 태도는 정서 안정과 자기 조절력 향상에 도움이 됨
4. 양육자의 심리적 건강: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안정적인 양육자의 존재는 아이에게 감정적 안정감을 제공함
5. 양부모 가정: 양육 책임이 분산되고, 더 많은 자원이 자녀에게 제공될 수 있음. 단, 단일 부모 가정이라도 안정적이고 지지적인 환경이라면 충분한 보호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음
6. 지역사회의 안전성과 신뢰도: 범죄율이 낮고 이웃 간 신뢰가 높은 지역에서는 자녀가 보다 자유롭게 사회적 활동을 하며 성장할 수 있음
7. 긍정적인 또래 관계: 친밀하고 안정적인 또래 관계는 정서적 지지뿐 아니라 사회성 발달에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함
ABCD 연구에 참여한 미국 버몬트대학 휴 개러밴 교수가 촬영한 기억력을 되살리는 동안 활성화된 뇌의 MRI 이미지. (사진=미국 NIH)
서경주 객원기자 kjsuh5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