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유지웅 기자] 정부가 한·미 관세 협의에서 '환율' 분야를 핵심 협상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미국 측 요청에 따른 건데요. 미국이 1985년 '플라자 합의'와 유사한 형태로 원화 절상을 요구할 수 있단 우려가 나옵니다. 원화 가치를 인위적으로 끌어올릴 경우, 한국 경제엔 상당한 타격이 예상됩니다. 특히 수출 기업을 중심으로 가격 경쟁력을 잃으면서 전체 경제 성장률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래픽=뉴스토마토)
펀더멘탈 결여한 통화절상…'마러라고 합의' 현실화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24일(현지시간) "스콧 베센트 미국 재무장관이 환율 정책을 별도로 논의하자고 먼저 제안했다"며 "이와 관련해 조만간 실무협의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엔 한국 통화가치를 끌어올려 무역·재정적자를 해결하려는 미국 의도가 담겨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경제 분야 핵심 참모인 스티븐 미런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은 지난해 11월 발표한 '글로벌 교역시스템 재구성에 대한 가이드' 보고서에서 이미 '환율전쟁'을 예고한 바 있습니다.
미런 위원장은 미국 이외 국가는 준비자산으로서 달러를 보유하려 하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달러 강세를 유발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 미국은 기축통화국으로 장점을 누리지만, 미국의 수출 경쟁력을 약화해 이른바 '러스트 벨트' 현상을 초래한다는 주장입니다.
미런 위원장은 상대국을 관세로 압박한 뒤, 10년 이하의 단기 미국 국채를 100년짜리 '무이자' 국채로 바꾸게 만드는 방법을 제시했습니다. 미국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유지하면서, 저금리로 달러 가치는 떨어뜨리고, 미국의 재정적자 규모를 줄이면서 부채를 지속 가능한 구조로 바꾼다는 구상입니다.
시나리오대로라면, 트럼프 대통령의 주요 공약이었던 '제조업 부흥'과 '감세'를 추진할 수 있습니다. '마러라고 합의'라고 불리는 이 계획은 달러 약세를 유도한다는 점에서 플라자 합의와 유사합니다.
플라자 합의는 1980년대 초반 달러가 강세를 보이면서 제조업 기반이 약해지고 실업률이 뛰어오르자, 미국이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일본, 서독, 프랑스, 영국의 협조를 이끌어 달러를 평가절하한 환율조정 협정입니다
문제는 '인위적 조정'입니다. 수출이 늘어나 경상수지 흑자가 많이 나고, 주식·채권시장에 외국인 자금이 많이 유입돼 자연스럽게 원화가 강세를 띠는 건 큰 부작용이 없는데요. '펀더멘탈'(기초체력)이 결여된 통화절상은 그 자체로 경제에 충격입니다.
실제 원화 가치는 달러인덱스(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와 상반된 흐름을 보일 정도로 저평가된 상태입니다. 달러 가치는 3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까지 떨어졌으나, 원달러 환율은 여전히 1400원대를 유지하고 있는데요.
올해 달러인덱스가 가장 높았던 1월13일(109.96)과 비교하면 달러 가치는 10% 넘게 평가절하된 상태입니다. 이 기간 유럽연합(EU) 유로화, 일본 엔화 모두 달러 대비 10% 넘게 절상됐는데, 달러 대비 원화 가치만 3%가량 오르는 데 그쳤습니다. 그만큼 대내외 경제 환경이 나쁘다는 뜻입니다.
앞서 플라자 합의로 당시 달러당 260엔대였던 엔달러 환율은 급격히 하락했습니다. 1년 뒤엔 달러당 150엔대까지 '엔고'(엔화 가치 상승)가 진행됐고요. 결국 급격한 엔고에 대응한 일본의 금융완화 정책은 버블을 낳았습니다. 이후 금리 인상, 부동산 대출 총량 규제 등으로 버블이 붕괴하자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을 맞았습니다.
(서울=연합뉴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왼쪽)이 2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주미대사관에서 열린 '한미 2+2 통상협의' 결과 브리핑에서 발언하고 있다. 오른쪽은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2025.4.25 [기획재정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원화가치 10% 오르면 총수출 3.4%↓"
수출 기업의 이익도 감소합니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중장기적으로 원화가치가 10% 오르면 총수출은 3.4% 감소하는데요. 이 경우 국내의 고용이 줄고, 설비투자가 위축돼 내수 침체로 전이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환율 상승으로 인한 피해는 대기업보다는 중소·중견 기업이 더 취약합니다. 고부가가치를 올리는 대기업에 비해 이윤을 덜 남기기 때문인데요. 낮아진 수입 물가는 디플레이션으로 이어질 위험성도 있습니다.
마러라고 합의가 관세 정책과 병행 추진되면서, 한국 경제는 관세·환율 이중 전선에서 동시에 압박받는 수순입니다. 반면 일본은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서 통화 문제가 제외될 걸로 보입니다.
스콧 베선트 재무부 장관은 이날 가토 가쓰노부 일본 재무상과의 회담에 앞서 "엔달러 환율의 구체적 수준을 요구할 생각이 없다"고 했습니다. 가토 재무상도 회담 뒤 "미국 쪽에서 엔달러 환율 수준 목표, 관리에 필요한 틀 등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고 했습니다.
유지웅 기자 wisema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