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규하 정책선임기자] 고요히 내려앉은 어둠 사이로 고양이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무대에 홀로 선 그리자벨라의 처연한 음색은 모두에게 외면 받은 쓸쓸함과 외로움에 대한 노래가 아니다. 한 마리의 고양이가 절규하는 존재의 의미보다 희망이란 심장을 뛰게 하는 묘한 감정의 무게를 보여준다.
뮤지컬 캣츠의 대표곡 <Memory>는 짧았던 기억, 행복했던 순간의 애잔한 회상이나 찬란했던 시간, 말하지 못한 찰나의 순간을 절절한 구절로 되뇌이게 만든다. 절제, 때론 힘찬 선율은 쫑긋 세운 귀가 무색하듯 기억이란 실에 걸린 감정의 선을 대변하고 있다.
늙고 추악한 한 마리의 고양이가 아니다. 우리가 아름다웠던 그날들, 행복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되살릴 수 있는 축적의 경험들. 고개를 돌려 달빛을 보던 그리자벨라의 노래는 지나간 영광을 그리워하는 노파의 푸념이 아니다. 잊혀간 존재의 '기억'. 그때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기억은 때론 가변적이나 시간이 흘러도 지속된 의식 속에 간직하고 다시 회상할 수 있다. 나라는 증거를 통해 잊혀감을 마지막으로 부여잡는 삶이 그렇다.
지난 2014년 6월17일 서울 용산구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에서 열린 뮤지컬 <캣츠> 내한공연 미디어콜에서 고양이 분장을 한 배우가 연기를 펼치고 있다. (사진=뉴시스)
만일 그리자벨라가 과거를 잃고, 현재에 머물 수 없으며 미래로 나아갈 수 없는 존재로 무대에 섰다면 그것은 정체성의 침식이지 않았을까 한다. 이름, 얼굴, 장소, 그리고 째깍째깍 흘러가는 시간들이 하나둘씩 희미해질 때 나의 기억은 사라진다.
단순히 가변적인 기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후천적으로 기억, 언어, 판단력 등의 여러 영역의 인지 기능이 감소하는 임상 증후군을 우린 '치매'라고 말한다.
치매는 단순한 건망증을 넘어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기억하지도 못한다. 공간 구별의 기능조차 무너져가는 적막한 관과 같다. 자신의 이름과 존재마저 잊은 내가 누구였는지에 대한 상실.
한국은 빠르게 고령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특히 65세 이상 노인의 10명 중 1명은 치매를 앓고 있다. 우리나라 치매 관리는 개인의 영역만이 아닌 국가의 책임 강화로 정책을 펼쳐왔다.
지역사회 기반, 수요자 맞춤, 전문성 강화 등이 대표적일 것이다. 하지만 도심과 인프라 거점 지역에 국한돼 여전히 사각지대에서 치매 관리 정책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불편한 교통, 분산 거주 등 지역 특성을 나누면 농어촌 지역이 대표적인 사각지대일 것이다. 농어촌 지역의 치매 관리 부재는 단순히 보건의료만의 문제가 아닌 지역 공동체의 붕괴, 복지 격차, 그리고 인권 문제까지 포괄하는 복합적 난제다.
지난해 9월26일 서울 서초구 동작대로 인근에서 열린 서초구치매안심센터 주최 실종 치매환자 발견 모의훈련에서 가상 치매환자가 길거리를 방황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최근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조사한 초고령사회 농촌의 치매 관리 실태를 보면, 농촌 노인 중 약 28%가 인지기능 저하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도시 노인 중 인지기능 저하자 비율은 22.7% 수준으로 변화가 없었다. 치매 진단을 받은 농촌 노인의 비율은 지난 2014년 2.6%에서 2023년 2.8%로 증가했으나 도시는 2.8%에서 1.7%로 오히려 감소했다.
같은 기간 전체 고령인구가 확대된 것을 고려하면 치매 진단을 받았거나 향후 치매 발병 위험이 있는 노인의 절대적 규모는 확대 추세라는 분석이다.
농촌의 인지기능 저하 노인이 약 55만9000명에서 약 71만1000명으로, 치매 노인은 약 5만명에서 7만1000명으로 늘어난 것이 이를 방증하고 있다. 조사에서는 농촌 정상 노인, 농촌·도시 인지기능 저하 노인 집단 각각 노인 복지정책 중 빈곤 완화를, 보건의료서비스 중 정기적 건강검진을, 치매 관련 서비스 중 기능 회복 훈련을 우선 확대해야 할 정책 과제로 꼽고 있다.
때문에 농촌 노인의 생활권 안에서 자연스럽게 치매 관리를 실현할 수 있는 지역 기반 돌봄 모델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치유농업의 경우 보건복지부와의 업무협약(MOU)을 통한 치매안심센터와의 협력 강화, 일부 지자체의 지역자율형 사회서비스 투자사업 연계 등을 시도했으나 여전히 소수 사례에 그친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회적 농업과 치유농업 모두 안정적으로 상기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치매관리 서비스 수행기관'으로서의 역량과 신뢰, 안전을 확보하고 운영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수 있는 정책 강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기억은 결국 혼자의 것이 아니 듯 나를 기억할 때 나는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자벨라의 노래가 무대를 채우고 관객의 마음에 여운을 남기 듯 우린 서로 기억이라는 삶 속에 존재할 공동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지난해 9월26일 서울 서초구 동작대로 인근에서 열린 서초구치매안심센터 주최 실종 치매환자 발견 모의훈련에서 가상 치매환자가 길거리를 방황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규하 정책선임기자 judi@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