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안정훈 기자] SK하이닉스가 엔비디아와 내년에 납품할 6세대 고대역폭메모리 HBM4의 가격을 5세대 제품보다 70% 가까이 인상하기로 결정한 가운데, 이러한 인상이 삼성전자와 마이크론의 엔비디아 공급망 진입 시도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관심이 쏠립니다. 당장 공급망 다변화를 노리고 있는 엔비디아와 SK하이닉스의 추가 공급 물량 협상 진행 속도가 예상보다 더딘 것으로 전해지면서, 삼성전자의 엔비디아 납품 여부와 시점에 다시 업계 촉각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지난 4일 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와 엔비디아는 HBM4 12단 제품 단가를 약 500달러대로 책정했습니다. 엔비디아가 내년에 출시하는 그래픽처리장치(GPU) 루빈에 HBM4를 탑재할 것으로 알려지면서 제조사들이 줄줄이 샘플을 납품하는 가운데, 처음으로 가격대가 드러난 것으로 기존 HBM3E 12단(300달러대)보다 70% 가량 대폭 인상된 것입니다.
큰 폭의 인상 뒤에는 SK하이닉스가 HBM 시장에서 가진 독보적 위상이 ‘가격 프리미엄’으로 반영됐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와 최근까지 HBM3E 12단을 공급한 주요 거래 파트너였으며, 우선적으로 HBM4 샘플을 납품해 가격 협상에 임한 주요 거래처입니다. 시장에서의 입지도 독보적으로, 시장조사 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의 지난달 조사 결과에 따르면 SK하이닉스의 올해 2분기 HBM 시장 점유율은 62%였습니다. 마이크론이 21%, 삼성전자가 17%로, 사실상 SK하이닉스가 시장을 지배하는 셈입니다.
HBM3E 12단 대비 공정 난도가 오른 점도 가격 상승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됩니다. HBM4는 두뇌 역할을 하는 ‘베이스 다이’에 파운드리 공정이 적용되는데, SK하이닉스는 TSMC에 공정을 맡기기로 한 상태입니다. TSMC를 공정 과정에 끼게 되면서 가격이 인상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다만 납품가가 월등히 높아지면서, 엔비디아도 공급망에 삼성전자와 마이크론이 진입할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SK하이닉스와의 추가 공급 물량에 대한 협상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엔비디아가 경쟁사의 HBM4 납품을 기다린다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실제로 두 회사 모두 고객사들에 HBM4 샘플을 납품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항공사진. (사진=삼성전자)
결과적으로 3사 간 납품 경쟁이 HBM4 가격 하락으로 이어지고, SK하이닉스가 독점적 지위를 상실할 수 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앞서 골드만삭스는 지난달 3사 간 경쟁에서 삼성전자가 ‘저가 전략’을 들고 나올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가격 결정권이 제조사가 아닌 고객사로 넘어갈 수 있다고 전망했습니다. 엔비디아에 대한 HBM 공급망이 다변화하고, SK하이닉스의 독점적 지위와 수익 구조에 타격이 있을 것이라는 분석입니다.
특히 SK하이닉스가 공정 과정을 TSMC에 맡긴 점을 우려한 지적도 있습니다. 유봉영 한양대학교 재료화학과 교수는 “HBM은 기술적 난도가 높아지는데, SK하이닉스가 기술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가 있다”며 “HBM4 이후로도 입지를 지키려면 HBM4 다음의 기술력도 입증해야 하는데, 그 부분을 들여다봐야 할 것”이라고 평했습니다.
한편 SK하이닉스는 내년부터 수요가 본격화할 HBM4 납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업계 관계자는 “SK하이닉스가 HBM4 양산을 준비하고 있고 2027년, 2028년에 대한 대비도 하는 것으로 안다”며 “HBM도 차세대 제품이 개발되는 속도가 점점 당겨지고 있다. 적기에 제품을 양산하고 기술적으로 뒤처지지 않는다면 향후 몇 년은 현재 위치를 지킬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안정훈 기자 ajh76063111@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