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안정훈 기자] 전력 수급 불안이라는 구조적 난제가 해소되지 않으면서 국가핵심산업으로 꼽히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가 이전설에 휩싸이고 있습니다. 단순한 전력 부족을 넘어, 지방에서 전력을 생산해 수도권 산업단지에 공급하는 구조가 균형발전 기조와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왔습니다. 전력 수급 및 지역경제를 위한 비수도권 이전론과,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중심으로 반도체 전략을 구상해온 기업들의 원안 추진 입장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양상입니다. 막대한 전력 수요와 수도권 집중 논란이 겹치면서 용인 클러스터는 매몰비용과 지역균형이라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됐습니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조감도. (사진=연합뉴스)
이전론 촉발…원인은 전력 수급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이전론에 불이 당겨진 것은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의 발언이었습니다. 김 장관은 지난해 12월 라디오 방송에서 “용인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반도체 시설이 입주하면 그 전력 수요는 원자력 발전소 15기를 가동하는 수준에 이른다”며 전력 공급이 원활한 지역으로의 이전 가능성을 시사했습니다.
실제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막대한 전력이 필요한 사업으로 평가됩니다. SK하이닉스는 약 600조원을 투입해 원삼면 일대 415만㎡ 규모의 반도체클러스터 일반산업단지를 조성 중이며, 삼성전자는 360조원을 들여 이동·남사읍 일대 777만㎡ 부지에 첨단시스템반도체 국가산업단지를 건설할 계획입니다. 초대형 설비가 집적되는 만큼, 이에 상응하는 전력 공급은 필수적입니다.
업계에 따르면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총 16GW(기가와트)의 전력이 필요할 것으로 추산됩니다. 이는 지난해 기준 국내 최대 전력 수요인 97GW의 약 16.5%에 해당하는 엄청난 규모입니다. 삼성전자는 9GW, SK하이닉스는 6GW의 전력을 필요로 하지만, 현재 확보한 전력은 각각 6GW와 3GW 수준에 그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현황. (인포그래픽=뉴스토마토)
이에 따라 부족한 전력 수급 방안이 쟁점으로 떠올랐습니다. 호남권과 동해안 등에서 전력을 끌어오기 위해 송전망을 확충하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지만, 송전탑 건설을 둘러싼 지역 주민 반발 등은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수도권 집중, 지역균형 역행”
전라북도 새만금으로의 이전론이 제기되는 배경도 이러한 전력 문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재생에너지 기반 전력 공급이 가능한 새만금으로 반도체 클러스터를 이전하면 전력 부족 우려를 완화하고, 송전망 증설에 따른 지역 갈등도 줄일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실제로 송전탑이 지나갈 예정인 경기·충청·전북 등에서는 시민단체와 환경단체가 에너지 불평등을 주장하며 증설을 반대하는 실정입니다.
지방에서 생산한 전력을 수도권 발전에 활용한다는 구조가 지역균형 측면에서 어긋난다는 우려도 제기됐습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지난해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전력 공급 리스크 진단’ 보고서에서 “반도체 산업은 전기·용수·열·가스·압축공기 등 유틸리티와 폐수 처리 시설 등 인프라가 필요하다”며 “유틸리티는 대부분 지방에 있는데 일자리와 세수는 산업단지가 입지한 수도권에 집중돼, 반도체 산업단지 개발이 송전선 등 갈등 요인을 발생시키고 지역균형발전에도 역행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지난해 12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에서 SK하이닉스 용인클러스터 착공이 진행되고 있다. (사진=SK하이닉스)
업계 “이미 투자…원안 유지해야”
반면 산업계는 이전론에 선을 긋고 있습니다. 이미 수년간 정부와 협의를 거쳐 입지가 확정됐고, 착공 및 토지 보상 절차를 진행 중인 가운데 계획 변경으로 발생할 매몰비용이 우려되기 때문입니다. 고종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략기획실장은 “반도체는 고객사에 제품을 적기에 납품하는 게 관건”이라며 “업계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중심으로 고객사에 대응하기 위해 투자하고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존대로 가는 걸 원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새만금으로 이전한다 해도 전력 수급이 완전히 보장되지는 않는다는 우려도 제기됐습니다. 새만금개발청에 따르면 현재 발전 용량은 태양광 0.3GW이며, 재생에너지 발전단지를 조성한다 해도 △태양광 2.8GW △풍력 0.1GW △연료전지 0.1GW 등 3GW대에 그치는 실정입니다. 지난해 12월 김의겸 새만금개발청장은 오는 2030년까지 발전 용량을 5GW로 높인다고 했지만, 이재명 대통령도 “물리적으로 가능한지 의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전 과정에서 발생할 매몰비용에 대한 보상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됐습니다. 황용식 세종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는 “정부 정책을 기업이 무조건 수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전 과정에서 발생할 추가 비용으로 기업 경쟁력이 저하된다면, 할 이유가 없는 것”이라며 “이전으로 발생할 손실을 해소할 보상안을 마련해서, ‘옮기는 쪽이 낫겠다’는 판단이 서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이 지난 7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바람직한 에너지믹스’ 2차 정책토론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반도체 클러스터 계획의 불확실성을 해소해야 할 정치권마저 오는 6월 치러지는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이전설에 휩쓸리면서 논란이 지역 갈등으로 번지는 양상입니다. 전북지사 출마를 준비 중인 안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5일 전북도당위원장인 윤준병 의원과 함께 ‘삼성전자 전북 이전 특별위원회’를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사실상 삼성전자의 팹을 전북으로 옮기기 위한 준비에 나선 것입니다.
반면 경기도 정치권은 여야를 막론하고 이전 및 분산 가능성에 선을 긋고 있습니다. 김동연 경기도지사는 4일 SNS를 통해 “사업의 불확실성은 줄이고 속도는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국민의힘 소속 이상일 용인시장도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을 흔드는 것은 나라를 망치겠다는 것”이라며 이전설을 일축했습니다.
일각에서는 이미 SK하이닉스가 착공에 들어갔고, 삼성전자도 토지 보상 절차를 진행 중인 상황을 감안해 일부 팹만 이전하는 중재안도 제시됐습니다. 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정책위원은 “결과적으로 부지 매입도 완전히 마무리된 상황이 아니”라며 “이미 착공이 시작한 만큼 산업단지를 동남권, 서남권 등으로 분할하는 방안도 폭넓게 논의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지방선거를 앞두고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가 정쟁으로 소비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이종환 상명대학교 시스템반도체학과 교수는 “장기적으로는 지방에 이전하는 게 지방분권 측면에서 좋을 수 있지만, 기업들은 당장 새롭게 준비하는 과정에서 생길 문제들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며 “경쟁국들은 이미 반도체에 천문학적인 돈을 투자하고 있다. 정치권이 키를 잡아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안정훈 기자 ajh76063111@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