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지우·김지평 기자] 정책금융기관은 세금과 공공기금을 활용해 국민의 삶과 산업 성장을 지원하는 국가 정책 집행의 핵심 축입니다. 이들 기관의 기능과 권한을 둘러싼 입법 동향은 정부의 정책 우선순위, 재정 운용 방향, 공공자금의 책임성 강화 의지를 가늠할 수 있는 지표로 작용합니다.
뉴스토마토 K-정책금융연구소의 평가 대상인 15개 정책금융기관에 대한 법안 발의 현황을 살펴본 결과, 7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7월까지 총 27건의 관련 법안이 발의됐습니다. 올해 상반기에는 '지역 균형발전', '공급망 안정화', '보증 사고 후속 관리' 등 핵심 정책 목적을 중심으로 정책금융기관의 공공 책임과 정책 집행 기능을 보다 명확히 하려는 입법이 이어졌습니다. 아울러 벤처투자 제도 정비, 명문 장수기업 육성, 정보 공개 확대 등 시장 기능 보완을 위한 법안도 함께 추진됐습니다.
기관별 발의 현황을 보면 △한국산업은행 3건 △중소기업은행 1건 △한국수출입은행 2건 △한국주택금융공사 1건 △HUG 8건 △신용보증기금 1건 △기술보증기금 1건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 2건 △한국벤처투자 4건 △한국해양진흥공사 4건이 발의됐습니다. 주택 정책금융기관(9건)과 국책은행(6건)에 발의가 집중됐습니다.
반면 일부 기관은 관련 법안이 단 한 건도 발의되지 않았습니다. 한국무역보험공사,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한국투자공사(KIC), 한국성장금융투자운용, 한국해외인프라도시개발지원공사 등 5개 기관에 대해서는 올해 단 한 건의 법안도 발의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무보, 캠코, 성장금융은 제22대 국회 들어 현재까지 관련 입법이 전무한 상태입니다.
입법 성과는 전반적으로 여전히 낮은 수준입니다. 올해 발의된 27건의 법안 중 공포된 것은 주택도시기금법 개정 1건뿐이며, 나머지 26건은 여전히 국회 본회의 전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HUG법 잇따라 발의…임차인 보호·책임 강화
올해 발의된 정책금융기관 관련 법안 중 유일하게 공포된 것은 국토교통위원장이 제안한 주택도시기금법 개정안으로, 지난 5월27일 공포됐습니다. '전세사기 방지법'으로도 불리는 이 법은 HUG가 보유한 임대인의 전세보증금 반환 보증 가입 이력을 임대인의 동의 없이 제공할 수 있도록 해 임차인의 정보 접근권을 확대했습니다.
HUG 관련 법안의 절반 이상은 상습 채무 불이행자에 대한 구상권 강화와 장기 연체자에 대한 채권 회수 실효성 제고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김희정 국민의힘 의원은 금융·신용·가상자산 거래 정보 등을 금융기관이 요청할 수 있도록 해 HUG의 채권 회수를 지원하는 법안을 발의했습니다. 또한 제도 시행 이전에 발생한 구상채권에 대해서도 임대인을 공개할 수 있도록 해 명단 공개의 실효성을 높이는 법안도 냈습니다. 두 법안 모두 임차인의 권익 보호와 전세사고 예방에 기여하려는 조치입니다.
이연희 민주당 의원은 HUG가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를 통해 공매 절차를 진행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발의했으며, 윤종군 민주당 의원은 HUG가 임차권 등기를 마친 주택에 대해 경매를 신청할 때 송달 문서를 발송한 시점부터 효력이 발생하도록 하는 '발송송달 특례' 규정 신설안을 제출했습니다.
주택도시기금 운용과 관련한 법안도 잇따라 발의됐습니다. 윤영석 국민의힘 의원은 지방 공기업의 자본 확충을 위해 주택도시기금 주택계정 용도에 지방공사에 대한 출자금 보조를 추가하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박용갑 민주당 의원은 주택도시기금이 도심융합특구사업에 출자·투자·융자할 수 있도록 투자 범위를 확대하는 법안을 발의했습니다. 홍기원 민주당 의원은 주택 구입 자금, 임차 보증금, 공공 재개발 이주비 등에 대해 이차보전사업을 적용할 수 있도록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법안을 제출했습니다.
주택도시보증공사 서울북부지사 모습. (사진=뉴시스)
산은·수은, 전략산업 법안으로 정책금융 역할 확대
산업은행 관련 법안은 3건이 발의됐습니다. 지난해 본점 부산 이전 관련 내용이 다수였던 것과 달리, 올해는 첨단전략산업기금 설치와 법정자본금 확대에 집중됐습니다. 반도체, 이차전지, 인공지능(AI) 등 전략 산업의 기술 자립과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목표로 하는 이 기금은 약 50조원 규모로 추진되며, 산은이 중심적 집행 기관 역할을 맡도록 법적 근거가 정비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산은의 수권자본금을 30조원에서 45조원으로 상향하는 산업은행법 개정안은 최근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를 통과해 입법화에 속도가 붙고 있습니다.
이종욱 국민의힘 의원과 신영대 민주당 의원이 공동 대표발의한 수출입은행 관련 법안에는 수은이 공급망안정화기금에 출연하고 해당 기금으로 핵심사업 투자 및 이자 지원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됐습니다. 이는 글로벌 공급망 위기에 대응해 국책은행의 역할을 강화하려는 취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중진공 관련 중소기업진흥법 개정안은 명문 장수기업 지정 요건을 완화하는 내용으로 2건 발의됐습니다. 민형배 민주당 의원은 지역 균형발전 기능 강화를 위해 산은·수은·신보·기은 등 4개 기관을 대상으로 '지역 균형개발'을 법에 명시하는 법안을 각각 발의했습니다.
강석훈 전 한국산업은행 회장이 4월28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원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강 전 회장은 6월 퇴임했으며, 현재 산업은행 회장직은 공석이다. (사진=뉴시스)
한벤투 '규제 정비'·해진공 '지원 확대'
한국벤처투자 관련 법안은 투자 환경의 자율성을 높이려는 규제 완화 흐름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일부는 운용 투명성 확보를 위한 규제 강화 내용을 포함했습니다. 박성민 국민의힘 의원은 벤처투자회사의 양도·분할·합병 시 행정처분 승계를 원활히 하도록 하는 법안을, 권칠승 민주당 의원은 벤처투자회사의 의무투자비율 달성 기간을 3년에서 5년으로 연장하는 법안을 각각 발의했습니다.
김종민 무소속 의원은 벤처투자 계약에서 대표자·최대주주에게 연대책임을 지우는 조항을 금지해 창업자의 책임 부담을 완화하려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반면 서왕진 조국혁신당 의원은 중소기업모태펀드의 회수 재원 추계 및 운용 현황을 국회에 제출하도록 의무화하는 법안을 발의해 벤처투자 운용의 투명성과 공공성 강화를 도모했습니다.
해양진흥공사법 개정안은 모두 민주당에서 발의됐습니다. 윤준병 의원은 공사의 법정자본금을 10조원으로 상향했고, 주철현 의원은 해운항만업 정의에 예선업과 도선업을 포함시켜 지원 범위를 확대했습니다. 문대림 의원은 파생상품 거래가 가능한 국제해양거래소 및 온실가스배출권 거래소 운영 근거를 마련하는 법안과 녹색경영 대응 업무를 법률에 상향 규정하는 법안을 각각 발의했습니다.
법안 90% 국회 문턱 못 넘어
제22대 국회 출범 이후 지난 7월까지 발의된 정책금융기관 관련 법안은 총 60건입니다. 이 중 실제 공포된 것은 4건에 불과하며, 대안 반영 폐기된 4건을 제외한 나머지 52건은 여전히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한 채 위원회 심사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입법이 제도 개선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는 가운데, 정책금융기관의 기능 강화와 공공성 확보를 위해 국회의 심사 속도 향상과 정치권의 공감대 형성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제기됩니다.
이광재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사무총장은 "정책금융기관이 지역 균형발전이나 공공 투자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려면 국민적 합의가 선행돼야 하는데, 충분한 사회적 논의 없이 발의된 법안은 국회 심사 과정에서도 법안의 취지나 세부 내용에 대한 이견이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며 "입법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 시급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지우·김지평 기자 jw@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