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칼럼)'산재와의 전쟁'이 놓친 것

입력 : 2025-08-12 오후 5:12:34
정향숙(49)씨는 삼성전자 경기 기흥공장에서 1994년부터 2015년까지 21년을 오퍼레이터로 일했다. 포토, 식각, 증착 등 반도체 여러 공정을 담당했던 6~9라인 엔드팹에서 유기화학물질을 다루며 방사선 계측 설비를 도맡았다. 일을 할 때도 만성 화농성 중이염을 반복적으로 앓던 그는 퇴직 후인 2022년 뼈에 생기는 희소질환인 ‘거대세포종’ 진단을 받았다. 왼쪽 턱 관절 아래쪽 관자뼈에 생긴 종양 제거 수술을 세 차례 받았지만 왼쪽 청력과 얼굴 일부 감각을 잃었다. 지난해 9월 근로복지공단 산하 서울남부업무상질병판정위(질판위)에 산재 요양급여 신청을 했다. 
 
지난달 24일, 근로복지공단은 정씨의 산재 요양급여 신청을 불승인했다. 작업 중 방사선의 일종인 ‘전리방사선’ 등 위해 물질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게 원인이라는 주장을 질판위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리방사선에 노출되었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았고, 전리방사선이 거대세포종 발병에 영향을 미친다는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지난해 같은 기흥공장 같은 6~9라인 전리방사선 계측 검사 설비에서 고농도의 방사선 피폭 사고가 발생해 두 명의 노동자가 6개월 이상의 치료를 받아야 하는 중대재해가 발생했다는 점을 볼 때, 정씨가 전리방사선에 노출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 질판위 결정을 납득하긴 힘들다. 아울러 방사선이 희귀종양인 거대세포종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명백한 과학적 근거도 없는 상황에서 방사선이 발병 원인이 아니라고 본 점도 무리하긴 마찬가지다. 방사선 노출이 암 발병의 한 원인이라는 것은 상식이다. 
 
정씨는 언론 인터뷰에서 “산재를 신청하니 지금 와서 ‘어떤 물질에 노출된 적이 있느냐’, ‘증거가 있느냐’ 묻고 있다”며 “100만명당 1명꼴로 발생하는 희귀(희소)질환인 거대세포종 환자가 같은 공장에서 두 명 발생해 한 명은 이미 돌아가셨다. 그건 우연의 일치인가”라고 말했다. 이어 “이렇게까지 힘들게 설명하고 증명해야 하는 구조가 참 서글펐다”고도 했다. 
 
2023년 10월, 국회 소통관에서 열린 '산업재해 선보장을 통한 국가책임제 실현 촉구 기자회견'에서 우원식 민주당 의원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지난달 30일, 반도체 노동자의 인권단체 ‘반올림’은 성명에서 “정부와 공단조차 반도체 공장의 암 발병 및 반복된 희귀 질병들의 발병 원인을 밝히지 못하고 있다. 하물며 아무런 정보를 제공받지 못한 피해자가 어떻게 희귀질환 원인 규명을 할 수 있단 말인가?”라며 “더욱이 반도체 기업은 영업비밀, 국가핵심기술 논리로 사용 화학물질 정보를 공개하지도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10여년 전 백혈병 등 반도체 노동자들의 산재와 기형 등 2세들의 생식독성 문제를 취재해 탐사보도한 적이 있다. 당시에도 산재 입증은 오로지 피해자의 몫이었다. 정보의 비대칭성 때문에 의료사고 입증을 환자가 할 수 없듯, 노동자가 자신의 질병과 업무와의 인과관계를 밝혀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산재보험 시행 60년이 지났지만 산재 입증 책임·업무상 재해 인정 기준 완화는 여전히 요원한 일처럼 보인다. 이름에 걸맞지 않게 산재 인정에 인색했던 대가로 근로복지공단은 오랜 기간 흑자 경영을 유지했다. 노동자들에게 돌아갈 보험료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이재명정부가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늦었지만 일하다 죽지 않는 사회를 위해 이제라도 근본적 대책이 마련되길 바란다. 다만 이 대통령이 근절을 지시한 사고성 재해 외에도 정씨 같은 질병 산재도 엄연하다는 점, 산재 예방의 시작은 산재 우선 보상제 등을 담은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의 전면 개정이라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오승훈 산업1부장 grantorino@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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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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