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오승훈 산업1부장] “신념의 일관성에서, 자신의 존재 조건에 대한 반성의 철저함과 항구성에서, 말과 행동의 일치에 대한 점검의 부단함에서 그를 앞설 사람을 나는 얼른 떠올리지 못한다. 그런데도 나는 그를 헌걸찬 운동가나 논객이나 지식인으로 떠올리기에 앞서 매력적인, 너무나 매력적인 개인으로 떠올린다.”
지난해 4월20일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홍세화 선생의 빈소가 마련되었다. (사진=뉴시스)
기자 출신 소설가 고종석은 지난 2006년 <한국일보>에 쓴 칼럼에서 홍 선생에 대해 이처럼 살가운 애정을 드러낸 바 있다. 그보다 앞선 2005년 정운영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이 타계했을 때, <시사저널>에 쓴 칼럼과 비교하면 홍 선생에 대한 고씨의 편애(?)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알 수 있다. 고씨는 그 칼럼에서 “내게 정 선생은, 자신의 관념 속에 자리 잡은 위대한 노동자 계급의 벗이었을지는 모르나, 자신의 주변에 실제로 존재하는 ‘비천한’ 노동자들의 벗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파리 한복판 생제르맹데프레의 고급 카페에 앉아서 중국의 문화혁명을 찬양했던 프랑스 지식인들의 모습에, 혁명에 환멸을 느끼자마자 이번에는 당찬 민족주의자로 선회해 드골주의의 품안으로 들어간 프랑스 지식인들의 모습에 정 선생의 먼 과거와 가까운 과거가 포개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썼다.
실제 가까이에서 본 홍 선생은, 외유내강형이었다. 늘 온화하게 타인을 대하되, 마음 안에는 단단한 그 무언가가 있었다. 그건 앞서 말한 선생의 자기성찰이기도 했고, 선생이 자신과 세상에 대해 견주며 살아온 부끄러움이기도 했다. 헌걸찬 운동가라고 하기엔 선생은 유순한 사람이었다. 그람시의 ‘이성으로 회의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를 좌우명 삼은 것처럼, 선생은 근본적으로 회의주의자였다. 회의와 낙관이라는 그 간극에서 쓸쓸함은 흘러나오고 있었다.
선생의 첫 책인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 사진이 '너무 여심 공략형 아니냐'고 놀리거나, 책 속 한 대목을 읊으면서 약을 올릴 때면, 선생은 아이처럼 박수치며 웃곤 했다. 그때마다 선생은 소년 같고 형 같았다. 한 번은 댁에 있을 때, 한총련 의장으로 수배를 받고 있던 학교 후배와 연락이 닿았고 뵙고 싶다는 말에 선생은 흔쾌히 오라고 하셨다. 따스한 눈빛과 표정으로 수배받던 이를 위로하던 선생의 모습이 기억난다.
홍 선생의 가족 사진. 선생을 제외하고 나머지 가족들은 현재 파리에 거주 중이다. (사진=홍용빈)
마침 선생의 아들이 내 또래였던 터라 한국에 올 때 같이 어울려 놀았다. 아들의 초대로 배낭여행 때 파리 라데팡스 선생님 자택을 방문하기도 했다. 아들뻘이었음으로 내가 선생의 양아들을 자처한 것은 일견 자연스럽기도 했다.
물신주의의 냄새가 물씬 나던 강남 한 호텔에서 이뤄진 내 결혼식. 선생은 주례사에서 “물신주의를 경계해야 한다”며 다소 파격적(?)인 말씀을 하셨다. 당시로서는 좀 뜨악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선생이 내게 들려주고 싶었던 말이었구나 싶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어 하고,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를 사고 싶어하는 지금의 내가 선생을 존경한다고 말하는 것은 민망한 일이다. 선생은 오늘의 나를 예감해 저런 주례사를 했겠지만, 어리석은 나는 선생의 말씀과는 너무도 먼 삶을 살고 있다. 선생과의 추억이 서려 있는 빌라 앞을 서성이며 한때 내 양아버지이자 친구였던 선생이 내게 가르쳐준 부끄러움에 대해 생각한다.
오승훈 산업1부장 grantorino@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