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 의장 루이스 바야스(에콰도르)가 차기 회의의 일정과 장소를 결정하지 못한 채 침울한 표정으로 무기한 정회를 선포하고 있다. (사진=UNEP)
[뉴스토마토 서경주·임삼진 객원기자] 8월5일부터 15일까지 스위스 제네바 유엔 유럽본부 팔레 데 나시옹에서 열린 플라스틱 오염(해양 환경 포함) 국제조약 마련을 위한 정부간 협상위원회 제5차 회의(INC-5.2)가 아무런 합의안 없이 끝났습니다. 이번 회의는 플라스틱 오염에 관한 세계 최초의 법적 구속력 있는 조약을 만들기 위해 지난 3년간 진행되어온 협상의 마지막 라운드였습니다. 이번 회의에는 183개국 2600여명의 대표단이 참가해 생산 감축, 유해 화학물질 관리, 재정 지원, 이행 체계 등 핵심 쟁점을 놓고 논의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합의(consensus) 방식이라는 제도적 한계 속에 소수 산유국의 반대가 걸림돌이 됐습니다.
회의에 참가한 183개국은 파리협정 이후 가장 중요한 환경 협정 체결을 기대했지만, 서로 모순된 ‘레드라인’을 고수하며 이견을 좁히지 못했습니다. 초안은 수없이 수정되었지만, 협상은 합의에 근접하지도 못한 채 성과 없이 종료됐습니다.
합의를 가로막은 네 가지 쟁점
△ 생산 제한
100개국 이상은 2060년까지 플라스틱 생산량이 3배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상류(생산) 통제 없이 폐기물 처리만 강조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대 국가들은 생산량 제한을 거부하며, 조약이 제품 설계, 재활용 및 재사용, 국가별 이행 계획을 우선해야 한다고 맞섰습니다.
△ 독성 첨가물 규제
노르웨이·유럽연합(EU)·르완다 등 ‘고야심 연합(HAC)’ 회원국은 유해 첨가물과 우려 고분자에 대한 국제법적 제한과 공급망 전반의 투명성을 요구했습니다. 반면 미국·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는 생산 감축뿐 아니라 독성 첨가물 금지·규제에도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고, 러시아 역시 강한 화학 규제보다 폐기물 관리 중심 접근을 선호했습니다.
△ 자금 조달과 정의로운 전환
취약국과 저소득 국가는 예방, 폐기물 관리 체계, 노동자 전환(‘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예측 가능한 재원을 요구했습니다. 새로운 기금 신설에서 용도가 지정된 다자기구 재원까지 다양한 방안이 제시됐지만, 아무것도 합의되지 못했습니다.
△ 의사 결정 방식
많은 참가국은 전원 합의만으로 결정하면 소수가 사실상 거부권을 행사해 과감한 목표(특히 생산 제한)를 가로막을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에 합의 실패 시를 대비한 ‘최후의 안전장치’로 표결 절차 유지를 요구했으나, 생산 제한에 반대하는 국가들이 전원 합의를 고수해 협상 진전을 막았습니다.
이번 INC 5.2 회의를 기념해 회의장 바깥에 캐나다 조각가 벤자민 웡이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재해석해서 만든 조각 작품 ‘생각하는 사람의 짐’은 플라스틱 공해의 심각성을 상징하고 있다. (사진=UNEP)
미국은 강경, 중국·한국은 신중
미국은 대표단은 파견했지만 입장 변화는 없었습니다. 미 국무부는 성명에서 “미국은 미국 기업과 플라스틱 및 관련 산업에 고용된 약 100만명의 노동자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과도한 생산자 규제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미국은 중국에 이어 세계 2위의 플라스틱 생산국입니다.
중국은 “플라스틱 전 생애주기(설계–생산–소비–폐기) 전반을 다뤄야 한다”는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인정해 생애주기 접근에는 동의 의사를 내비쳤습니다. 다만 생산 상한이나 첨가제 금지 같은 업스트림(상류) 규제에 대해서는 명시적 지지를 유보했습니다. 중국은 2022년 기준 전 세계 플라스틱의 생산량의 약 32%를 차지합니다.
한국은 HAC 회원국으로서 전 생애주기를 아우르는 법적 구속력 있는 협약에는 원칙적으로 동의하면서도, 이번 회의에선 생산 상한제(cap) 등 강한 상류 규제에 대한 공개적 지지는 자제하고, 중재 역할과 다운스트림(제품 설계·순환성·폐기물 관리) 논의에 무게를 둔 중도적 입장을 보였습니다.
환경단체들, “소수 산유국이 협상 무너뜨렸다”라며 실망감
플라스틱 오염 대응을 위한 국제 협약 협상이 결국 합의에 실패하자, 주요 환경단체들이 일제히 비판 성명을 내놓았습니다.
국제 환경단체 GAIA(Global Alliance for Incinerator Alternatives)는 의장단이 제시한 수정안에 대해 “우리의 건강, 과학, 인권, 미래를 모두 외면한 문서”라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어 “다수 국가의 의지를 배신하고, 석유국과 화석연료 업계의 탐욕만 반영했다”고 주장하면서 “불완전하고 좋지 않은 협약이 나오는 것보다 차라리 협약이 없는 편이 낫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국제환경법센터 CIEL(Center for International Environmental Law) 대표단은 성명에서 “이번 회의는 명백한 실패였다. 일부 국가는 협약을 만들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하기 위해 왔다”고 지적했습니다.
WWF는 성명을 통해 매달 플라스틱 쓰레기가 100만톤씩 쌓이는 현실을 지적하며 “이번 협상 결렬은 전 세계 환경 보호 희망에 큰 타격”이라고 밝혔습니다.
숫자가 말하는 현실: 2060년, 생산 3배 전망
현재 전 세계는 연간 약 4억6000만톤의 플라스틱을 생산합니다. 1950년 200만톤과 비교하면 엄청난 증가입니다. 이 중 재활용 비율은 약 9%에 그치며, 나머지는 매립·소각됩니다. 매년 약 2000만톤은 처리되지 않은 채 토양, 하천, 해양으로 유입돼 환경을 오염시키고, 일부는 미세플라스틱 형태로 식품과 인체에까지 침투합니다. 최근 연구는 혈액과 뇌, 나아가 난자·정자에서도 미세플라스틱이 검출되고 있다고 보고합니다. 현 추세가 지속되면 2060년 생산량은 13억톤 이상으로 늘어날 전망입니다.
남은 질문: ‘덜 만들 것인가, 더 잘 처리할 것인가’
UNEP 사무총장 잉거 안데르센(Inger Andersen)은 “우리는 원하는 곳에 이르지 못했지만, 사람들은 협상을 원하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협상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밝혔습니다. 하지만 이번 회의는 세계적 환경 위기를 다루는 해법에서 근본적인 균열을 드러냈습니다. 글로벌 해법이 “더 나은 폐기물 관리”에 초점을 맞출지, 아니면 “애초에 훨씬 적게 생산”하는 상류 통제를 포함할지, 두 가지 질문이 협상장을 가르는 경계가 됐습니다. 파나마 협상가 후안 카를로스 몬테레이 고메스의 말은 이를 함축합니다. “파이프에서 물이 쏟아지는데 바닥만 닦을 수는 없습니다.”
제네바의 제트 드 오(Jet d'Eau) 앞에서 “플라스틱 협정 지금!”이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그린피스 활동가들. (사진=Green Peace)
서경주·임삼진 객원기자 kjsuh5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