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사이언스)혈소판, 혈액 속 세포외 DNA의 저장소로 밝혀져

혈액 속 작은 조각, 알고 보니 거대한 정보 저장소

입력 : 2025-08-21 오전 9:51:08
혈액 속에 있는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의 이미지. 가장 작고 뾰족한 돌기가 불규칙하게 나 있는 게 혈소판이다.(이미지=게티이미지뱅크)
 
[뉴스토마토 서경주 객원기자] 혈소판(platelet)은 피가 났을 때 지혈을 돕는 기능을 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혈소판은 골수의 거대핵세포(megakaryocyte)가 세포질 일부를 잘라내듯 떼어내어 혈류로 방출한 작은 조각입니다. 따라서 세포핵(nucleus)이 없고, DNA를 포함하지 않으며, 세포 분열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포질, 소기관(미토콘드리아, 분비 과립 등), 막 단백질 등을 갖추고 있어 ‘세포 조각(cell fragment)’으로 정의됩니다.
 
혈액 속을 흐르는 이 작은 세포 조각은 핵이 없기 때문에 유전 정보를 담고 있는 DNA와는 무관하다고 여겨져 왔습니다. 하지만 최근 옥스퍼드대학교 연구진이 세계적 학술지 사이언스(Science)에 발표한 논문은 기존의 통념을 완전히 뒤집었습니다.
 
이 연구에 따르면 혈소판은 단순한 응고 인자가 아니라, 혈액 속에 떠다니는 세포외(cell-free) DNA를 흡수해 내부에 저장합니다. 이 DNA는 단순한 쓰레기 조각이 아니라, 종양에서 떨어져 나온 돌연변이 DNA나 임산부 혈액 속 태아 DNA 같은 중요한 생체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즉, 혈소판은 혈액 속에 떠다니는 생체 정보를 모으는 ‘작은 센서’이자 ‘저장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포외 DNA에 담긴 생체 정보
 
우리 몸의 세포는 늘 분열하고 죽습니다. 그 과정에서 유전자 조각들이 혈액 속으로 흘러나오는데, 이것이 흔히 cfDNA로 표기하는 세포외 DNA입니다. cfDNA는 정상적인 생리 과정에서도 일정 수준 존재합니다. 그러나 종양 환자의 경우 cfDNA의 농도가 증가하거나, 종양 특이적 유전적 변이를 포함한 cfDNA가 검출될 수 있으며, 이러한 특성이 질병의 중요한 바이오마커로 활용됩니다. 실제로 최근 10여 년간 의학계는 혈액 속 cfDNA를 분석해 암을 조기 진단하거나, 임신 중 태아의 유전 정보를 파악하는 ‘액체 생검(liquid biopsy)’을 연구해 왔습니다.
 
지금까지는 혈장을 분리해 그 속의 DNA를 찾아내는 방법이 주로 사용됐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 DNA는 쉽게 파괴되거나 농도가 낮아 분석이 까다로웠습니다. 옥스퍼드대 연구진은 여기서 발상을 전환했습니다. 혹시 혈소판이 이런 DNA를 빨아들이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혈소판을 들여다보는 게 더 정확한 진단 방법이 되지 않을까? 이런 물음에 답하기 위해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현미경으로 확인된 놀라운 결과
 
연구진은 고해상도 현미경과 특정 DNA/RNA 서열을 형광 신호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형광 염색 기법(FISH), 디지털 미세액적(droplet) 중합효소 연쇄반응(ddPCR), 전장유전체 시퀀싱(Whole Genome Sequencing) 같은 첨단 도구를 총동원했습니다. 그 결과 건강한 사람의 혈소판 약 8%에서 DNA 조각이 실제로 포착되었습니다. 단순히 표면에 붙어 있는 수준이 아니라, 혈소판 내부 깊숙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건 DNA의 출처였습니다. 암 환자의 혈소판에서는 종양 유래 돌연변이가 포함된 DNA가 발견됐습니다. 또한 임산부 혈소판에서는 태아의 Y 염색체 DNA가 검출됐습니다. 즉, 혈소판이 몸속에서 흘러나온 중요한 ‘정보 조각’인 cfDNA를 수집·저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암과 태아 진단의 새로운 열쇠
 
지금까지 액체 생검은 혈장을 중심으로 cfDNA를 찾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혈장 DNA는 양이 적거나 불안정해 암의 조기 발견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반면 혈소판 DNA(pDNA)는 훨씬 안정적이고, 더 많은 정보를 담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암의 조기 발견은 환자의 생존율과 직결됩니다. 현재는 증상이 나타난 뒤에야 암이 진단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 혈소판 속 DNA 분석으로 발생 초기의 작은 종양을 잡아낼 수 있다면, 치료 전략은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 연구를 이끈 옥스퍼드 대 생물의학연구센터 박사후 연구원 로렌 머피(Lauren Murphy)는 “이번 연구는 혈소판이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건강에 훨씬 더 중요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또한, 현재의 액체 생검 검사법이 혈소판에 포함된 귀중한 유전 정보를 간과하고 있음을 지적니다. 혈소판에 cfDNA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확인한 이번 발견은 암 검진 검사의 정밀도를 향상시켜 이전보다 훨씬 일찍 암을 발견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산전 진단에서도 혈소판은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기존의 비침습적 산전 검사(Non-Invasive Prenatal Testing)는 혈장 DNA를 기반으로 하지만, 혈소판 DNA 분석이 더 정확한 결과를 얻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미완의 단계지만 새로운 가능성 열어
 
이번 연구는 혈소판이 cfDNA를 흡수하는 정확한 메커니즘은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혈소판이 단순히 혈액 속 ‘쓰레기 DNA’를 청소하는 기능을 할 수도 있고, 면역 시스템과 연결된 보다 정교한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혈소판 DNA의 어떤 부분이 암에 대한 가장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는지, 그리고 혈액 검사를 통해 어떻게 그 정보를 정확하게 찾아낼 수 있는지 평가하기 위해서는 추가 연구가 필요합니다. 또한 임상에서 실제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환자 데이터를 통한 검증과, 혈소판 DNA를 안정적으로 추출하고 분석하는 표준화된 방법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새로운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옥스퍼드 대학교 혈액학과 교수이자 이 연구의 기획자인 베단 사일라(Bethan Psaila)는 “혈소판이 혈액 내에서 미세한 DNA를 흡수하는 역할을 한다는 발견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이번 연구에서 얻은 한 가지 행운이라면 혈소판이 우리 몸의 모든 조직에서 발생하는 DNA 손상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혈소판 분석은 암을 포함한 다양한 선별 검사를 개선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혈소판은 그동안 단순한 지혈기능을 하는 것으로만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이번 연구는 이 작은 조각이 생체 정보의 집약소이자, 미래 의료를 바꿀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암과 같은 치명적인 질환을 조기에 발견하고, 임신 중 태아의 유전 정보를 더 안전하게 확인할 날을 한층 앞당길 가능성을 열어주었습니다.
 
해당논문 링크: https://www.science.org/doi/10.1126/science.adp3971
 
혈소판(platelet)이 cfDNA를 흡수해 저장하고 활성화되면 이 DNA를 방출하는 것을 보여주는 전자현미경 영상 캡처 (이미지=MRC)
 
서경주 객원기자 kjsuh5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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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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