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배덕훈 기자] 미국 조지아주 현대자동차와 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HL-GA)의 불법체류자 단속 사건을 두고 관세 협상을 빌미로 해외 기업에 투자를 유도하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정책의 제도적 모순이 드러났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특히 자국민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트럼프식 강경 이민정책 기조와 해외 투자 유치 전략이 상충됨에도 동맹국 기업을 겨냥한 ‘표적 단속’이 사실상 횡포에 가깝다는 지적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업계에서는 그간 관행적으로 묵인돼 왔던 미국 비자 문제가 수면 위에 떠오르면서 사태 장기화에 따른 경영 환경 위축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HL-GA 배터리 회사) 건설 현장. (사진=연합뉴스)
8일 재계와 외신 등에 따르면 이번 미국 이민·세관 단속국이 현대자동차·LG에너지솔루션의 합작 배터리 공장에서 일하는 한국인 직원 수백 명을 대거 구금한 초유의 상황은, 트럼프 행정부의 제도적 모순에 따른 결과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관세 협상을 빌미로 외국 기업의 자국 투자 유치에 열을 올렸지만, 전문 인력 수급 등의 어려움을 외면한 채 강경 이민정책을 밀어붙인 모순이 드러난 까닭입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5일(현지시간) 이번 단속을 두고 “그들은 불법체류자였고, 이민세관단속국(ICE)은 자기 할 일을 한 것”이라고 두둔한 것이 동맹국 기업에 대한 횡포라는 비판도 더해집니다. 그간 자신이 미국에서 쫓아낸 불법체류자와 이번 사건이 동류라는 인식이 깔린 언급입니다. 이틀 뒤 트럼프 대통령은 “그것(인재를 데려오는 일)을 신속하고 합법적으로 할 수 있도록 만들겠다”면서도 “미국에 투자하고 있는 모든 외국 기업에 우리나라 이민법을 존중해줄 것을 촉구한다”고 기존 입장을 되풀이하기도 했습니다.
외신도 트럼프 대통령의 모순된 점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뉴욕타임스(NYT)는 “미국 내 제조업 확장이 가속화되는 상황과 이민 단속이 맞부딪히며 긴장감이 드러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특히 NYT는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 대기업들에 투자를 장려하면서도 숙련된 인력 파견에 필요한 비자 발급을 어렵게 만들었다고 꼬집었습니다. 미국상공회의소 아시아 담당 부회장을 지낸 태미 오버비 올브라이트스톤브리지 선임고문은 NYT에 이번 단속이 “아시아 기업들의 (미국 투자·사업 의지에) 냉각 효과를 일으켰다”고 비판했습니다.
미 이민 당국이 공개한 현대차-LG엔솔 이민 단속 현장. (사진=ICE 홈페이지)
편법 출장…‘예견된 사태’ 지적도
트럼프 대통령의 모순된 정책과는 별개로 이번 초유의 단속·감금 상황이 예견된 사태라는 지적도 더해집니다. 정부와 재계 등에 따르면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일하려면 비이민·취업 목적의 H-1B 비자나 주재원 비자(L1·E2)를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절차가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데다 쿼터도 제한돼 있어 전자여행허가제(ESTA)나 회의 참석, 계약 목적의 B1 비자를 소지해 출장을 가는 관행이 이어져왔습니다. 결국 오랫동안 이어진 이 같은 편법 사례가 결국 이번 사태를 불러 일으켰다는 지적입니다. 재계 관계자는 “전문 비자 발급의 슬롯이 정해져 있는 등 발급이 쉽지 않기에 업무 기일을 맞추고자 급하게 ESTA로 편법 출장을 가는 일이 빈번했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연간 H-1B 비자 발급 건수는 8만5000개로 제한된 데 반해, 세계적으로 신청자 수는 50만명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싱가포르나 호주 등 일부 국가들은 수천건에서 1만여 건의 쿼터를 확보하고 있지만 한국은 아직까지 쿼터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또한 외교부가 최대 1만5000개의 한국인 전문 인력 취업비자 E-4 신설을 위해 미국 내 입법에 힘써왔지만, 법안은 의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부는 미국 투자 기업들과 긴급 간담회를 열고 비자 체계 점검에 나섰습니다. 이날 산업통상자원부는 현대차그룹, LG에너지솔루션을 비롯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LG화학 등 대미 투자를 진행 중인 기업들을 만나 현재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비자 체계에 대한 건의 사항을 청취했습니다. 정부는 수렴한 의견을 바탕으로 단기 파견에 필요한 비자 카테고리 신설이나 비자 제도의 유연한 운영 등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미국 측과 협의를 이어갈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미국 당국의 이민 단속으로 체포된 현대차-LG엔솔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 직원들이 수감돼 있는 있는 조지아주 포크스턴의 이민세관단속국(ICE) 구금 시설. (사진=연합뉴스)
하지만 업계의 불안은 여전합니다. 관행적으로 묵인되던 편법 출장이 큰 문제가 되는 등 이번 사태가 장기간 이어질 것을 우려하는 분위기가 팽배합니다. 재계 다른 관계자는 “이번에 비자 문제를 미국 측과 빠르게 협의한다고 해도 수개월 이상은 소요가 될 텐데, 그동안 아무래도 출장 등 미국 관련 업무 위축은 불가피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현지 분위기 뒤숭숭…또 다른 ‘논란’
이런 가운데 이번 이민 단속 사태를 직접 신고했다고 주장하는 조지아주 기반 정치인 토리 브래넘이 또 다른 폭로를 이어가면서 새로운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번 이민 단속 사태를 신고한 브래넘은 SNS를 통해 불법 체류자 암매장 등 의혹을 또다시 제기한 상황입니다. 이와 관련 현지 한인 매체인 ‘애틀랜타K한인뉴스’는 해당 내용을 보도하며 “브래넘의 발언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고 했습니다.
한편 HL-GA 공장은 과거 잇딴 사망사고로 지역사회의 지탄을 받은 바 있습니다. HL-GA 공장에서는 지난 3월 공사 인부 1명이 지게차에 치여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고, 5월에도 20대 노동자 한 명이 작업 도중 지게차 적재물이 떨어지며 사망했습니다.
배덕훈 기자 paladin703@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