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사이언스)"세포 기억은 온·오프 스위치보다 조광기 다이얼에 가깝다"

MIT 연구진, 아날로그형 후성유전학적 기억 규명

입력 : 2025-09-11 오전 9:36:51
MIT 연구진은 세포 기억이 온/오프 스위치보다 조광기 다이얼에 가깝다고 밝혔다. (사진=MIT)
 
[뉴스토마토 서경주 객원기자] 우리 몸의 세포는 태어나면서부터 특정한 정체성을 유지합니다. 예를 들어 손등의 피부세포가 갑자기 뇌세포로 변하지 않는 이유는 ‘후성유전학적 기억(epigenetic memory)’ 덕분입니다. 지금까지 과학계는 이 기억이 전등 스위치처럼 유전자의 발현을 ‘켜기(on)’ 또는 ‘끄기(off)’로 구분해 저장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MIT 연구팀이 9월 9일 세계적인 저널 셀 유전체학(Cell Genomics)에 발표한 연구는 이 정설을 뒤흔듭니다. 연구진은 세포의 유전자 기억이 단순한 이진(binary) 방식이 아니라, 밝기를 조절하는 조광기(dimmer)처럼 연속적인 스펙트럼으로 유지될 수 있음을 밝혀냈습니다. 바로 ‘아날로그형 후성유전학적 기억(analog epigenetic memory)’입니다. 이 연구를 이끈 MIT 기계·생물공학과 도미틸라 델 베키오(Domitilla Del Vecchio) 교수는 “우리의 발견은 세포가 단순히 켜짐/꺼짐 상태가 아닌 특정 수준의 유전자 발현으로 유전자를 고정함으로써 최종 정체성을 확립할 가능성을 열어준다”라며 “그 결과 우리 몸에는 현재 우리가 알고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세포 유형이 존재할 수 있으며, 이들은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고 건강 또는 질병 상태의 기반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푸른빛으로 드러난 아날로그 기억
 
연구팀은 관찰된 중간 유전자 발현이 우연인지, 아니면 지금까지 간과되어온 세포의 확립된 특성인지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이를 위해 실험실에서 흔히 사용되는 햄스터 난소 세포를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각 세포에서 조작된 유전자의 발현 수준을 서로 다르게 설정했습니다. 일부 세포에서는 유전자를 완전히 활성화했고, 다른 세포에서는 완전히 비활성화했으며, 나머지 세포에서는 켜짐과 꺼짐 사이의 중간 수준으로 설정했습니다. 
 
연구팀은 이 유전자에 발현 수준에 따라 밝기가 달라지는 형광 표지자를 결합했습니다. 연구진은 유전자의 DNA 메틸화를 유발하는 효소를 일시적으로 도입했는데, 이는 자연적인 유전자 잠금 메커니즘이다. 이후 5개월 동안 세포를 관찰하며 이 변형이 유전자를 중간 발현 수준에 고정시킬지, 아니면 완전히 켜지거나 꺼진 상태로 이동한 후 고정될지 확인했습니다.
 
예상과 달리 유전자는 시간이 지나도 완전히 켜지거나 꺼지지 않았습니다. 강렬한 푸른빛, 희미한 푸른빛, 거의 보이지 않는 빛 등 다양한 밝기가 세포마다 고정된 채 수개월간 유지됐습니다. 이는 유전자 발현이 스펙트럼의 어느 지점이든 ‘기억’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델 베키오 교수는 “모든 강도 수준이 시간이 지나도 유지된다는 것은 유전자 발현이 이진(binary) 방식이 아닌 단계적 또는 아날로그(graded or analog)임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면 유전자가 완전히 켜지거나 꺼지는 방향으로 치우칠 것이라고 예상했기에 매우 놀랐다”라고 말했습니다. 
 
의학·생명공학에 미칠 수 있는 파장
 
이 발견은 스위치 방식이 아닌 라디오 다이얼처럼 세포 게놈 내 특정 유전자 발현을 조절함으로써 더 복잡한 인공 조직 및 장기를 설계하는 새로운 길을 열었습니다. 또한 세포의 후성유전적 기억이 정체성을 확립하는 방식에 대한 이해를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치료 저항성 종양에서 관찰되는 것과 같은 세포 변형을 보다 정밀하게 치료할 가능성을 제시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치료제에 저항하는 종양세포가 중간 수준의 유전자 발현 상태를 ‘기억’하며 살아남을 수 있다는 설명이 가능해집니다. 반대로 연구자들은 특정 유전자의 발현 강도를 조정해 인공 장기나 조직을 더 정밀하게 설계할 수도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공과대학(Caltech) 생물학 및 생물공학과 마이클 엘로위츠(Michael Elowitz) 교수는 “델 베키오와 동료들은 DNA 자체에 대한 화학적 변형을 통해 아날로그 기억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훌륭하게 보여주었다”라며 “그 결과, 진화가 만들어낸 이 자연적 아날로그 기억 메커니즘을 합성생물학 분야에서 재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영구적이고 정밀한 다세포 행동을 프로그래밍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라고 평가했습니다. 
 
이 연구의 제1저자인 MIT의 세바스티안 팔라시오스(Sebastian Palacios) 박사는 “인간에게 복잡성을 가능케 하는 요소 중 하나는 후성유전학적 기억이다”라며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에게는 정말 놀라운 일이다. 이 아날로그 기억이 생물학 전반에 걸쳐 다양한 과정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연구진은 아날로그 기억을 활용해 세포 운명을 조정하는 정밀 생명공학적 기술을 발전시키는 후속 연구를 진행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논문 DOI: https://S2666-979X(25)00241-1
 
세포 기억에 관한 MIT 연구의 모형도. (사진=Cell Genomics)
 
서경주 객원기자 kjsuh5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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