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종용 선임기자] 올 들어 금융당국의 은행권 최고경영자(CEO) 호출이 잇따르고 있는 가운데 은행들의 속내는 착잡합니다. 정치권 인사들이나 당국 수장들과 두 달에 한 번꼴로 만남을 가지고 있지만, 업계 건의 사항이 해결된 것은 전무합니다. 반면 교육세 인상과 배드뱅크 분담금, 서민금융 금리 인하 등 상생금융 압박은 한층 거세지고 있습니다.
두 달에 한 번꼴 회동
이억원 금융위원장은 15일 오후 서울 중구 은행연합회에서 금융지주 회장들과 간담회를 가졌습니다. 조용병 은행연합회장을 비롯해 양종희 KB금융지주 회장, 진옥동 신한금융지주 회장, 함영주
하나금융지주(086790) 회장, 임종룡
우리금융지주(316140) 회장, 이찬우 NH농협금융지주 회장 등이 참석했습니다.
간담회 직전에는 이 위원장의 취임식이 있었습니다. 야당의 반대로 인사청문보고서 채택이 불발됐지만 이재명 대통령은 이 위원장의 임명을 강행했습니다. 그런데 취임 날 곧바로 대외 일정을 잡은 것은 이례적입니다. 금융당국 한 관계자는 "금융권과의 상견례는 통상적 행사로 시간을 갖고 가지는데, 임명 과정의 논란을 불식시키기 위해 간담회 일정을 급하게 잡은 것으로 안다"고 전했습니다.
최근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의 행보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위원장보다 한 달여 앞서 임명된 이 원장은 은행과 보험사, 카드사, 빅테크기업과 CEO 간담회를 가졌습니다. 이 위원장은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금감원장이 금융위원장 일을 대신하는 것이냐" 등의 질의를 받은 바 있습니다. 청문위원들은 금융위원장의 역할을 부재하다며 '바지사장', '허수아비'로 보인다는 표현을 쓰기도 했습니다.
금융권에서는 금융당국의 호출이 탐탁치 않습니다. 보여주기식 행사에 그친다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금융당국 수장을 비롯해 정치권이 은행권 CEO를 소집한 것은 올 들어 총 다섯 차례입니다. 두 달에 한 번꼴로 은행회관에 호출한 셈입니다. 이사회 의장 소집까지 포함하면 그 이상입니다. 한 금융지주 관계자는 "유력 대선주자부터 수장들까지 일정을 잡으니 다른 일정을 핑계대고 안 가기가 힘들다"며 "국내 출장 잡기도 어렵다"고 했습니다.
앞서 지난 1월20일 당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IBK기업은행 등 6대 은행장과 '상생금융 확대를 위한 간담회'를 가졌습니다. 취약층 금융 지원을 충실히 이행해달라는 당부의 자리였지만, 비공개 면담에서 특정 매체의 광고 집행 상황을 물으면서 정쟁으로 비화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4월에는 같은 장소에서 국회 정무위원회 국민의힘 소속 의원들이 은행장들을 소집했습니다. 탄핵 등 불확실성이 확대되는 상황에서 은행의 역할을 당부하기 위함이라는 명분이었습니다. 그 밖에 이복현 전 금감원장이 지난 2월 20개 국내은행 은행장과 간담회를 열었고, 이찬진 원장도 지난달 28일 취임 후 은행장 간담회를 가졌습니다.
(그래픽=뉴스토마토)
"업계 건의 수용 전무"
금융권 입장에서도 금융당국 수장과의 만남이 불필요한 일만은 아닙니다. 간담회 자리를 빌어 업계 건의 사항을 전달할 수 있고, 실무진 차원에서 논의가 지지부진한 제도 개선이 '톱다운 방식'으로 처리될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은행권에서도 그간 정치권 인사나 금융당국 수장과의 회동마다 규제 완화 필요성을 건의해왔습니다.
위험가중자산(RWA) 등 규제 개선이 대표적입니다. 기업대출 RWA 조정 건의는 지난 4월 국민의힘과 은행장 간담회에서 수면 위로 부상했습니다. 기업대출의 RWA 위험가중치를 낮춰 은행들이 기업대출을 확대할 유인을 마련해달라는 게 은행장들의 요구였습니다.
이재명정부 출범 이후에도 은행권에선 부동산 주택담보대출을 줄이고 기업대출이나 모험자본에 투자를 확대하기 위해 RWA 조정을 줄곳 건의해왔습니다. 금융당국도 '생산적 금융' 확대를 위해 RWA 조정을 검토하겠다고 밝혔지만, 기대만큼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제결제은행(BIS) 산하 바젤은행감독위원회(BCBS)가 도입한 바젤Ⅲ 규제를 따르고 있어 규제 개선에 제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젤Ⅲ 규제 체계는 가계대출보다 기업대출에 높은 위험가중치를 적용하기 때문에 기업대출 비중이 높을수록 RWA가 증가하고 자본건전성 관리에 부담이 커집니다. 은행권 한 관계자는 "그나마 정부 정책과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는 답변만 반복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은행권의 숙원 과제인 비금융업 전면 허용과 투자일임업·신탁제도 개선도 요원해졌습니다. 현재 은행의 투자일임업은 일임형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에 한해 제한적으로 허용되고 있으며, 증권사나 자산운용사, 보험사에 비해 상품 설계와 운용에 큰 제약이 따릅니다. 정부와 당국이 금융소비자 보호를 강조하는 가운데 불완전판매를 야기하고 소비자 보호 정책에 위배된다는 반대 논리가 힘을 얻고 있습니다.
반면 교육세 인상과 배드뱅크 분담금, 서민 금융 금리 인하 등 상생 압박은 한층 거세지고 있습니다. 정부가 현행 0.5%인 교육세율을 1%로 2배 인상하기로 하면서 은행·보험 등 금융사가 내는 교육세는 약 1조1000억원(은행 7500억원, 보험 3500억원)에서 2조원 이상으로 1조원가량 늘어납니다. 장기 연체자의 채무 탕감을 위한 배드뱅크 설립에 필요한 재원 8000억 중 금융권 분담이 4000억입니다. 이 대통령이 서민 금융 금리를 지적하면서 금융사 출연금 기반의 서민금융안정기금도 추진될 것으로 보이는데, 은행권의 부담이 불가피한 상황입니다.
금융권 관계자는 "금융정책 변화에 따라 민간 영역의 금융권 부담이 크게 늘어나는 관치금융이 지배하고 있다"며 "전향적 규제 완화로 은행들이 더 많은 자금을 공급하고, 값싼 이자로 대출을 내 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억원(왼쪽 여섯번째) 신임 금융위원장이 15일 서울 중구 은행연합회에서 열린 8대 금융지주 회장 간담회 시작 전 참석자들과 단체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종용 선임기자 yong@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