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세계대전 후 승전국들이 독일에 요구했던 배상금과 같은 조치를 동맹국에 하고 있다."
한·미 관세 협상에 대해 미국 경제정책연구센터(CEPR) 딘 베이커 수석이코노미스트는 16일 국내 언론 인터뷰에서 "이런 식의 합의는 본 적이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미국이 1차 세계대전 패전국 독일에 막대한 배상금을 물린 것처럼 동맹국인 한국을 다루고 있다는, '참담한' 평가를 미국 싱크탱크가 내놓은 것이다(베이커는 1999년 CEPR을 공동 설립자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예견한 경제학자다).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5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트럼프 행정부는 한국이 약속한 3500억달러(약 484조원) 규모 대미 투자를 대출·보증이 아닌 현금으로 트럼프 대통령 임기 내에 투자를 완료하고, 그 투자처는 미국이 결정하며, 투자금 회수 후에는 이익의 90%를 미국이 갖겠다고 한다. 한국 GDP의 20%, 현재 외환보유고(4160억달러)의 84%에 달하는 3500억달러를 3년 안에 내놓으라는 얘기다. 실제 이렇게 된다면 한국의 환율과 수출, 물가가 어떻게 될지는 불문가지다.
'울며 겨자 먹기'로 한국이 요구한 통화스와프도 미국은 거부했다. 오히려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은 일본이 이미 관세 협상에 합의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한국은 그 협정을 수용하거나 관세를 내야 한다. 흑백은 없다"고 압박한다.
미국인에게도 트럼프 행정부가 막무가내로 보였을 게다. 딘 베이커는 한국이 관세 25%를 15%로 낮추기 위해 3500억달러를 쓰느니, 관세 피해 수출기업을 지원하는 것이 낫다는 아이디어까지 내놨다. 10% 관세 인상에 따른 1년 피해액이 125억달러인데, 3년치 375억달러를 내고 마는 게 훨씬 이익이라는 것이다.
미국은 일본을 사례로 한국을 압박하지만, 번지수가 한참 틀렸다. 일본은 경제 규모가 한국의 2.5배, 외환보유고도 3배(1조324억달러) 수준이다. 무엇보다 기축통화국이고, 미국과 무제한 통화스와프가 가능하다.
트럼프 행정부 요구안, "제2의 플라자 합의냐" 우려까지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면서, 1985년 '플라자 합의'를 떠올리는 이들도 나온다. 막대한 무역적자와 재정적자에 시달리던 레이건 행정부는 1985년 9월, 뉴욕 플라자 호텔에 일본, 서독, 프랑스, 영국의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들을 불러 모은 뒤, 달러 가치를 인위적으로 하락시키고, 엔화·마르크화 등의 평가절상을 유도한다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서독 등도 있었지만 핵심은 당시 미국을 따라잡는 게 아니냐고 할 정도로 잘나가던 일본이었다. 엔화가 갑자기 2배나 절상되면서 수출 의존도가 높던 일본 기업들이 치명적 타격을 받았고 이에 따른 재정 확대→자산 급등→버블 붕괴 과정을 통해 '잃어버린 30년'이라는 장기 불황에 빠지게 됐다는, 그 '플라자 합의'가 재현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거다.
지난달 25일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큰 대강은 합의했고 세부 사항만 실무 협상으로 마무리하면 된다고 생각하던 정부도 당황해하는 모습이다. 거기에 지난 4일 '조지아주 한국 노동자 대규모 구금 사태'까지 겹치면서 국민 여론도 격앙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18일 공개된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 인터뷰에서 관세 협상 관련해 "미국의 요구에 동의했다간 내가 탄핵될 판이었다"며 "그래서 미국 협상팀에 합리적인 대안을 요청했다"고 말했다. '탄핵' 표현이 상황의 심각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 인터뷰는 지난 3일 대통령실에서 했는데, 공개될 때까지 상황은 큰 변화가 없는 셈이다.
그는 지난 11일 기자회견에서도 "최종 결론은 합리적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전제를 두면서도 "협상의 표면에 드러난 것들은 거칠고, 과격하고, 과하고, 불합리하고, 비상식적"이라고 표현했다.
조현 외교부 장관이 16일 외교·통일·안보 분야 대정부질문이 진행된 국회 본회의에서 한미 관세 협상과 관련한 국민의힘 김건 의원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장관들 "과거 미국 아니다" 이례적 공개 비판
최근 대통령실과 내각 분위기도 마찬가지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지난 9일 공개석상인 한국방송기자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일본과 한국은 처한 상황이 너무 다르다"며 "우리는 절대 그런 문안으로는 사인할 수 없다"고 했다. 관료나 정치인들이 잘 사용하지 않는 '절대'라는 표현이 눈에 띈다. 16일에도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가 "기업이 미국에 투자하러 가는 것은 돈을 벌러 가는 것이지, 돈을 퍼주러 가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고 했다.
관계 장관들은 공개적으로 미국을 직접 비판하고 있다. 한국 외교에서는 극히 이례적인 '사건'이다. 직업 외교관 출신은 조현 외교부 장관은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미국 요구대로 관세 협상을 문서화했다면 경제에 큰 주름살이 될 수 있는 내용들이었다"며 "과거에 많은 동맹국이나 우방국들에 상당히 좋은 협력을 해오던 미국이 아니라는 걸 실감하고 있다"고 답했다. 경제 관료 출신인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도 트럼프 행정부에 대해 "합리성과는 거리가 멀다. 10년, 20년 전에 우리가 알던 미국이 아니다"라고 고강도 발언을 했다.
이제 협상은 장기전을 대비해야 하는 상황으로 가고 있다. 이 대통령은 내부적으로 "시간에 쫓겨 졸속으로 타결하지 말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산업통상자원부는 미국의 관세 부과로 어려움을 겪는 수출기업들에 연내에 정책자금 13조6000억원을 긴급 지원하는 계획을 짜고 있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도 "가변성이 크다고 봐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이라는 변수를 보면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17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간담회).
그래도 현 상황에서 다행인 것은 대미 관세 협상에 대한 국내 여론이 통일되는 양상이라는 점이다. 외교·안보 분야에서 대표적인 보수 인사인 천영우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조선일보> 칼럼에서 "한·미 관세·투자 합의에 매달릴 필요 없다"며 "우리에게 카드가 없는 것도 아니다. 협상이 결렬되면 미국도 조선 산업 재건의 꿈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통상교섭본부장 출신인 김종훈 전 새누리당 의원도 "한국 정부가 협상의 판을 깨고 싶어하지 않더라도 이대로면 판이 깨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평가한 뒤 "지난 7월 말에는 세계 각국이 미국과 무역 합의를 보는 상황이다 보니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이점까지 다 내려놔버릴 정도로 급하게 무역 합의를 봤다"며 "이번에도 어물쩍 넘어가버리면 '한국은 밟으면 밟히는 나라'라는 인식만 커지게 된다"(<매일경제>)고 지적했다. 판을 깰 각오로 임하라는 주문이다.
황방열 통일외교 전문위원 bangyeoulhwa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