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창경 재테크전문기자] 미국과의 관세 협상이 난항을 겪으며 국내 수출기업들이 고전 중인 반면 미국 시장에서 이들과 경쟁 중인 일본 기업들은 순항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양국의 주요 경합 업종 대표 종목들끼리도 온도 차가 나타나고 있는데요. 관세 협상 장기화로 외환시장도 불안 증세를 보이고 있어 당분간 이런 흐름이 이어질 전망입니다.
관세 압박, 한-일 주가 차이 키워
30일 주식시장은 보합권을 벗어나지 못한 채 지지부진한 흐름을 나타냈습니다. 0.14% 오른 강보합세로 출발했으나 사흘 후의 반등이었던 전일의 상승을 이어가지는 못했습니다. 긴 추석 연휴를 이틀 앞두고 눈치 보기가 이어진 결과입니다.
최근 국내 주식시장의 조정은 미국과의 관세 협상이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데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정부가 관세 협상 과정에서 미국에 약속한 3500억달러 규모의 투자 방식을 두고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는 외환위기 가능성을 내세워 일시금 지급을 거부하고 있으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돌연 ‘선불금’을 언급하는 한편 반도체, 제약 등에 대한 고율 관세를 예고,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습니다. 그 영향으로 국내 증시는 신고가 랠리를 멈추고 지난주부터 조정 양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반면 먼저 관세 협상을 마무리한 일본은 천문학적 규모의 투자를 약속, 협상의 성패를 두고 이견은 있으나 주식시장만큼은 부담을 털어낸 모습입니다.
이로 인해 미국 시장에서 경쟁하고 있는 한국과 일본의 주요 기업들의 주가에도 이 같은 온도 차가 반영되는 모습입니다.
(표=뉴스토마토)
차·반도체 등 일본 주가 우위
일본 도쿄증시에 상장된 도요타자동차는 이날 2849.5엔으로 9월 거래를 마감했습니다. 지난 7월 이후 3개월 동안 16.06% 오른 가격입니다. 현대차는 21만5000원을 기록, 같은 기간 5.13% 상승하는 데 그쳤습니다. 대미 관세가 두 회사에 미치는 영향력 차이가 주가에도 나타난 결과입니다.
도요타자동차는 미국에서 판매하는 자사 차량의 현지 생산 비중이 45%에 달합니다. 현대차는 32% 수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관세율이 같아도 도요타가 유리한 상황인데 일본 자동차 업체들의 대미 수출 관세는 15%, 우리 기업들은 25%인 것이 현실입니다.
양사 모두 미국 시장에서 중소형차 위주로 경쟁 중인데요. 현대차가 쏘나타와 아반떼를 국내에서 생산해 수출하는 것과 달리 도요타는 동급 차량 캠리와 코롤라를 현지 생산합니다. 게다가 현대차와 기아가 미국 현지 생산에 힘준 아이오닉5, EV6 등 전기차는 이날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 종료된 후 보조금이 사라져 판매에 직격탄을 맞게 됩니다. 도요타, 혼다 등 일본 기업들에게도 15% 관세는 부담이겠지만, 적어도 우리 기업과의 경쟁에서만큼은 앞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아시아에 투자하는 글로벌 펀드라면 자동차업종에 배분된 자금을 유지하더라도 도요타자동차를 사고 현대차를 팔아 비중을 맞출 유인이 큽니다.
반도체 시장도 비슷한 상황입니다.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절대강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버티고 있지만 주가 양상은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6만전자’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던 삼성전자가 드디어 ‘8만전자’로 복귀, 3개월간 40% 상승률을 기록했는데요. 매출 규모가 삼성전자의 절반 수준에 불과한 일본 키옥시아홀딩스는 같은 기간 86% 급등해 삼성전자를 2배 이상 뛰어넘었습니다.
반도체 장비업체 또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한미반도체는 한때 반도체 부활의 선봉장 역할로 존재감을 뽐냈지만 7월 이후 주가 성적은 –5.02%로 저조합니다. 그 사이 일본의 어드밴테스트는 37.68%나 올랐습니다.
수주량으론 중국에게 글로벌 1위 자리를 내줬으나 기술력 1위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는 K-조선주도 최근 성적만 보면 일본과 호각세입니다. 미쓰비시중공업과 HD현대중공업이 큰 차이가 나지 않고 기자재 업체들의 주가 흐름이 비슷합니다.
국내 조선업계에 새로운 시장을 안겨줄 것으로 기대되는 미 해군의 유지·정비·보수(MRO) 사업마저 일본 업체들과의 경쟁이 본격화될 전망입니다. 지난 몇 달 사이 국내 업체들이 연달아 MRO 계약 소식을 전하며 초기 수주가 시작됐음을 알렸는데요. 일본 업체들도 MRO 수주 뉴스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MRO 사업은 미국 정부가 주도한다는 특성상 대미 관세 협상에서의 온도차가 MRO 계약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금·달러·일본 비중 확대
미국의 관세 압박이 장기화할수록 우리 기업들에게 더욱 부담일 수밖에 없는 것은 외환시장의 불안감이 개별 주가의 발목을 잡는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8월말 기준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4163억달러입니다. 여기에서 원-달러 무제한 스왑 계약 없이 미국의 요구대로 3500억달러 투자에 응할 경우 외환시장은 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큽니다. 원·달러 환율이 1400원을 넘어선 이유입니다.
미국의 요구에 응하기도 거절하기도 어려운 상황에 글로벌 금융시장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전 세계를 향한 미국의 압박 수위가 높아질수록 국제 금 가격이 오르는 것도 지켜볼 대목입니다. 연일 신고가를 기록 중인 국제 금 선물가격(12월 만기)은 트로이온스당 3900달러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반면 달러인덱스는 하락을 멈추고 제자리에서 등락 중입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기준금리 인하를 시작했고 연내 추가 2회 인하를 예고했는데도 달러 가치가 유지되는 것은 주요국들의 통화가치가 하락했음을 의미합니다.
주요 지표들이 경고 사인을 보내는 가운데 우리 증시는 긴 연휴의 시작을 앞두고 있습니다. 추석 연휴 기간 중 우리 증시와 관련도가 높은 미국 ISM제조업지수가 발표되고, 9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의사록도 공개될 예정입니다.
국내 금융시장의 변동성이 커진 만큼 현금 비중을 늘리거나 달러 환율에 노출된 자산 또는 국내 기업과 경합하는 일본 주식 종목으로 갈아타기 등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김창경 재테크전문기자 ckkim@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