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의, 나의 알코올 일지③)술과 장미의 나날, 그때나 지금이나

입력 : 2025-10-10 오전 6:00:00
얼마나 많은 사람이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1865~1939)를 좋아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나는 그다지 그의 시를 애송하지 않았다. 아니 잘 몰랐다. 그런데 그의 시집 중에 『술은 입으로 들어오고 사랑은 눈으로 들어온다』(김천봉 엮음, 소명출판, 2024)가 있다는 걸 알았다. 당연히, 이 연재 때문에 알게 됐다. 그 책 40쪽에는 「술타령」이라는 시가 있다.
 
술은 입으로 들어오고/ 사랑은 눈으로 들어온다/ 우리 늙어 죽기 전에/ 알아야 할 진리는 그뿐/ 나 술잔 들면 입으로,/ 나 당신 보면, 한숨이네
 
왜 마지막 시 두 행에 쉼표를 각각 넣었을까. 아마 술이 들어가는 잠깐의 시간을 알려주려 한 것 아닐까. 입에 넣을 때 한 번, 목으로 넘기는 짧은 순간 한 번을. 아 모르겠다. 분명한 건 예이츠도 꽤 술꾼이었던 모양이다. 예이츠는 아일랜드인이었고 시인이자 정치가였다. 그가 '아일랜드 자유국'의 상원의원이 된 것은 1922년의 일이고 그해는 아일랜드 독립의 아버지이자 배신자였던 마이클 콜린스가 암살됐던 해다. 콜린스는 IRA(아일랜드 공화국 군대)를 이끌며 혁혁한 무장 독립투쟁을 벌였으나 결국 영국과의 협상에서 아일랜드를 자치령으로, 북아일랜드를 영구 영국령으로 하는 데 합의해 분단국가를 만들었다. 그 과정은 켄 로치의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2006)에 잘 그려져 있다. 당연히 마이클 콜린스는 다른 투쟁가들, 특히 IRA 내부의 반발을 사 암살당했다. 예이츠는 그렇게 아일랜드가 내부 분열을 일으킬 때 국회의원이 됐다는 얘기인데, 그가 당시 얼마나 술을 마시고, 얼마나 분기탱천하는 연설을 하고 다녔으며, 얼마나 울분을 삭이고, 얼마나 많은 시를 썼을 것이며, 그래서 또다시 얼마나 술을 마셨을 것인가를 상상케 한다. 예이츠의 시 「술타령」은 그에 비해 다소 한갓진데 그게 다 어쩌면 자신의 마음을 위장하기 위한 것이었을 수 있겠다 싶다. 혁명을 논하는 자, 술을 많이 마시고 가장 낭만적인 사랑을 찾기 마련이다.
 
<하우스 오브 기네스> 프로덕션 스틸 이미지. (이미지=Ben Blackall, Netflix)
 
아일랜드의 술은 역시 흑맥주 기네스다. 모든 맥주는 맛을 일괄해서 말할 수는 없다. 다만 기네스를 드래프트로만 마신 사람들은 라거의 부드러운 목 넘김과 같은 느낌으로만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소맥을 많이 마셨던 한국 중년남들에게는 이 부드러움이 너무 약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알코올 도수 7도가 넘는 '엑스트라 스타우트'가 제격이지만 이걸 파는 데는 그렇게 많지 않다. 서울 한남동에 있는 한 노포는 어울리지 않게 IPA 원조 격인 캘리포니아산(産) '인디언 페일 에일'과 더블린산 기네스 생맥주를 판다. 돼지갈비 전문점이다. 난 종종 돼지갈비가 아니라 이 맥주들을 마시러 간다. 석 잔 정도 먹으면 알딸딸해진다. 그 기분을 느끼기 위해 사람들은 도수가 높은 수제 맥주를 찾는다. 기네스가 원래는 잉글랜드 창업주의 것이라는 점은 역사적 아이러니다.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일본 제국주의 시절의 한 일본인이 안동소주를 만들어 한국의 대표 양조장의 주인이 된 것과 같은 맥락인 셈이다. 어쨌든 그런 얘기는 넷플릭스 드라마 <하우스 오브 기네스>(2025)에 다 나와 있다. 
 
석간 기자들의 단골집이던 '무교동 북어국집'. (사진=Daum 갈무리)
 
젊었을 때 잠깐, 그러니까 한 4~5년간 석간신문 기자로 생활할 때 낮술을 자주 마셨다. 석간 기자는 일을 일찍 시작한다. 매일 5시 전에 일어나 5시 반에는 어김없이 편집국에 앉아 있어야 한다. 초판 마감은 9시이다. 이 생활을 수십 년 한 친구들이 있다. 원래는 사진기자였으나 나중에는 취재기자로 일한 김구철 같은 친구가 그렇다. 나하고는 기자 동기인 친구다. 그는 정년퇴임 전까지 34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른 새벽 출근했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마치 김유신의 말처럼 5시 반이면 자기 몸이 회사에 나가 앉아 있는 괴력을 선보였다. 존경할 만한 일이다. 나는 수십 년간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석간 기자는 새벽에 집중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다. 당연히 아침은 공복인 상태다. 9시에 아침밥을 먹으러 가서는, 그날이 마침 데스크에 왕창 깨진 날이라거나, 신경전을 벌인 날이면 아침 식사보다는 술을 시키곤 하는데 그게 그날 하루의 사단(事端)이 되는 경우가 많다. 서울 무교동에는 전설의 북엇국집인 '무교동 북어국집'이 있고 여기에는 요즘 대기 줄이 겹겹이 설 만큼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30년 전에는 석간 기자들이 해장국과 해장 소주를 하기 위해 매일같이 찾던 곳이었다. 아침 술이 조금 과해지면 오전 11시가 되고 2차를 옮기게 되는데 그 시간은 마침 일반 직장인들의 점심시간이다. '석간의 용사들'은 종종 이 틈바구니에서 2차 술을 시작하곤 했다. 내가 낮술에 중독되기 시작한 것은 과거 새벽의 종이신문 노동자로 살았기 때문이다. 핑계는 무덤을 넘나든다. 아침 빈속을 훑어 들어가던 소주 맛, 점심 짜장면의 짜장을(면이 아니라) 안주로 마시던 소맥의 맛은…, 잊을 수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그게 무슨 맛이겠는가. 다만 그렇게 마셔대던 사람들과의 대화와 분위기가 그리울 뿐이다. 혹은 '뿐일까?'이다. 시로 시작한 술자리가 다시 시로 되돌아가곤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쯤 되면 다시 예이츠의 시를 들출 만하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당신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사랑했고/ 진실되거나 거짓된 사랑으로 당신의 아름다움을 사랑했는지/ 그러나 오직 한 사람만이 당신 안의 순례자의 영혼을 사랑했고/ 변해가는 당신 얼굴의 슬픔까지 사랑했지요 (예이츠, 「그대 늙었을 때」)
 
아침부터 소주나 소맥을 마셔대면 아무리 항우장사라도 견딜 수는 없는 법이다. 대체로 건강을 상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바꾸는 술이 바로 맥주다. 사람은 담배를 끊을 수는 있어도 술은 끊을 수 없다. 술이 가져다주는 애환의 카타르시스를 잊을 수가 없게 된다. 약간 도수가 있는 기네스나 IPA, 맛있는 라거 두세 잔은 건강을 해치지 않는다.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난, 생각한다. 자고로 맛있게 먹어야 하는 것, 맛있는 걸 찾아 먹어야 하는 것은 세 가지이다. 커피와 와인, 그리고 맥주다. 
 
서서 술을 마시는 오사카의 술집 골목 텐마(天馬). (사진=필자 제공)
 
서서 술을 마시는 오사카의 술집 골목 텐마(天馬). (사진=필자 제공)
  
1년에 한 번쯤 흥청망청 술을 마시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그렇게 즐기기에는 지금이 많이들 부담스러운 시대지만 1박 일정으로 오사카에 가면 좋다. 일찍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고 저녁 전 오사카에 도착해 도착하자마자 밤새 술을 마신 후 다음 날 오후 비행기로 오는 일정이다. 완전히 술꾼을 위한 1박 2일 여정이며 이때 갈 곳이 바로 텐마(天馬)라는 이름의 술집 골목이다. 셰프 박찬일의 책 제목 『오사카는 기꺼이 서서 마신다』(모비딕북스, 2019)로도 알 수 있듯이 오사카에서는 사람들이 서서 술을 마신다. 한 술집에서 한두 잔씩만 하고 가는 술버릇들 때문이다. 텐마 입구에 들어서서 구불구불 술집을 전전하며 한두 잔씩 마시고 옮기고 또 옮겨 가다 텐마 출구에서 나올 때쯤이면 완전히 만취 각이다. 여기가 일본인지 한국 부산의 광복동 어디메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텐마 술집 골목을, 사랑하는 사람과 가보길 권한다. 술은 입으로 들어갈 것이며 사랑은 당신의 눈으로 들어갈 것이다. 세상이 어떻게 될지, 트럼프의 미국이 망하고 일본은 지진으로 침몰하며, 러시아는 전쟁으로, 중국은 정치 독재로 쇠락할 수도 있겠다. 1920년대 1차 대전 직후의 다다이스트들처럼 살아가는 것도 인생을 지탱하는 한 방법일 수 있다. 무엇을 아끼고 무엇을 바랄 것인가. 술과 장미의 나날일 뿐이다. 마침 영화도 한 편이 있다. 클래식 무비이다. <술과 장미의 나날>. 1962년. 감독 블레이크 에드워즈. 주연 잭 레먼, 그리고 리 레믹. 시대는 이렇게 돌고 도는 법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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