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기지 않겠지만, 무엇보다 관심도 없겠지만, 나의 ‘최애’ 안주는 양파다. 혹은 마늘쫑이다. 매일같이 마시는 맥주 몇 잔에 사람들은 땅콩이나 육포를 먹을지는 모르지만 나는 양파와 쌈장을 차린다. 당연히 입냄새가 지옥 같아지고(정작 나는 모르지만) 그래서 혼술의 빈도가 높아지는 이유가 된다. 양파와 마늘류를 좋아하게 된 건 순전히 짜장면 때문이다. 술꾼은 술꾼을 알아본다고 중식당에서 소(맥)주 안주로 짬뽕은 노, 짜장을 먹는 사람이 진짜 술꾼이다. 이런 사람들은 말한다. 어허. 소주에 매운 거 먹으면 속이 많이 긁혀. 부드러운 짜장이 소주 안주에 최고지. 그래서인지, 다음 날 부글대던 속이 가라앉으면 제일 먼저 찾는 것이 두 가지였다. 기름기가 졸졸 흐르는 볶음밥과 거기에 얹힌 짜장 소스. 그리고 춘장에 양파. 그러다 한 잔을 더 하곤 했다. 젊은 시절, 철학의 빈곤과 빈곤의 철학을 왔다 갔다 하던 시절의 일이다.
영화 <리스본 야간열차>에서 그레고리우스 역으로 나오는 제레미 아이언스가 책을 읽는 장면. (사진=나이너스엔터테인먼트 제공)
졸업 후 처음으로 사회에 나왔던 시절, 요즘에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방통위(그때는 그냥 방송위원회였다) 출판부에 다니면서 일보다는 술을 더 마셨다. 그때 모시던 S 부장이 진정으로 미친 술꾼이었고 당연히 낮술의 제왕이었다. 누구를 끌고 다녔느냐, 당연히 내가 주 멤버였다. 왜? 낮술을 마다하지 않았으니까. 주류 언론사 출신이었던 그는, 그렇게 심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거기서 밀려 여기까지 왔다는 약간의 자괴감을 대체로 낮술 안주 삼았다. 우리는 종종, 아니 자주 무교동의 ‘초류향’이라는 중식당을 갔고, 거기엔 누룽지탕이 맛있어서 나는 그의 한탄 아닌 한탄을 듣는 둥 마는 둥 소맥과 누룽지탕을 번갈아 후루룩대곤 했다. 술꾼으로서 S 부장과 윤석열을 나란히 놓고 보자면 둘은 당연히 자신의 직무에 소홀한 사람들이지만 한 명은 인간의 선(善)이란 걸 지켰던 사람이고 한 명은 서울대 엘리트주의란 천박한 사고에 빠져 스스로 악인이란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진실로 전기치료 요법이 필요한 인간이다. 그럴 때마다 생각나는 영화는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 오렌지>(1971)다. 그런 영화, 저런 인간이 봤을랑가 몰라,라고 말하곤 한다. 그에 반해 그때의 S 부장은 착하고 유순한, 출판부 내에서 모두 ‘우리 순둥이 부장’이라고 불렀을 정도다. 배운 게 적었을까. 노. 난 그에게서 아래 사람을 대하는 따뜻함을 배웠다. 윤석열의 실패는 바로 그 인성(人性)의 확립에 있다. 진짜 술꾼은 품성이 착한 사람들이다.
화제이긴 했으나 관객은 그리 많이 모으지 못했고 영화도 다소 엉성한 부분이 없지 않았던(내가 대체로 이렇게까지 얘기할 때는 관념의 똥을 싸는, 지극히 관념적이라는 영화라고 생각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개봉 당시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잘못하면 요즘 인기라는 ‘매불쇼’의 영화 코너 ‘시네마 지옥’인가 뭔가처럼 되기 때문이다. 아 그거 진짜 지옥이다), 그러나 짜증 날 만큼 매력적인 작품 <봄밤>(2025)에서 주인공 영경(한예리)은 마음이 여리고 착한 여인이다. 그녀는 세상과 부딪히지 않기 위해서는 알코올이라는 장벽으로 스스로 담을 쌓고 그 안에 들어가 죽치고 앉아 있는 것이 자기식 화해라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영경이 술 마시는 방법을 유심히 지켜봤는데 그녀는 편의점에서 꼭 맥주 캔 하나와 소주 한 병을 사서 마신다. 감독 강미자가 모르는 게 있는데, 편의점에서는 사발면은 먹을 수 있어도 술은 마실 수가 없다. 밖에 파라솔에 앉아서는 먹을 수 있다. 이상한 법과 규정이다. 영화 검증이 잘못됐다. 따지는 건 아니다. 아무튼 영경은 캔을 따서 한 모금을 마시던가, 한다. 그리고 거기에 소주를 졸졸 섞는다. 전형적인 술꾼의 방식이다. 생맥주와 소주를 같이 마실 때도 무릇 술에 무식한 자들만이 생맥이 오자마자 거기에 소주를 바로 섞는다. 그러면 맥주는 당연히 넘치게 된다. 그런 사람이 있을 때면 아 아 안돼,라고 외치며 말하곤 한다. “룸을 만들어야지 룸. 자자 살짝 먼저 건배.”
소설이나 영화에 언급돼 로망이 된 술들이 있다. 사과가 주원료인 칼바도스는 소설 『개선문』에서 독일인 라비크가 마시던 독주다. (이미지=챗 GPT)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만난, 알코올 분야의 진짜 광인은 라디오 프로듀서 Y였다. 1990년대 후반 그는, 지금은 없어진(없어지다시피 한) TBS의 초창기 남산 시절에 전설의 아나운서 임국희 씨가 진행하던 프로그램의 담당 프로듀서였다. 나는 그 프로의 고정 게스트였는데, 스튜디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콜 사인을 넣어야 할 담당 PD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작가가 그를 대신하고 있을 때가 많았다. 언젠가 PD Y와의 술자리에서 경악한 적이 있는데 세 명이 가서 앉자마자 그는 피처 석 잔을 시켰다. 오백 석 잔이 아니고. 천천히 하나하나 시키자고 했지만, 고개를 절레절레하던 그가 피처 석 잔이 나오자마자 각자에게 돌린 후 이렇게 외쳤다. “자, 원 샷!” 그는 실제로 피처 맥주를 한 번에 반 잔씩 두 번에 마시는데 나는 그때 그의 목젖이 열린 채 술이 목구멍으로 콸콸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과도한 음주로 TBS에서 스스로 퇴사한 후 한참을 쉬다가 YTN 라디오가 개국하면서 거기 CP로 갔다. 거기서는 정년 직전 명퇴를 했을 것이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사는지 모른다. 여전히 목젖을 열고 콸콸 붓고 있을까. 그도 성격은 나쁘지 않았던 사람이다. 나름 서로 좋아했었던 기억이 난다. 무엇보다 TBS는 그런 기억이 담겨 있는 인간적인 방송이었다. 그런 방송을 없애서야 되겠는가. 서울시장이 그러면 안 된다.
내가 아직 안 마셔본 술(마시긴 했는데 하도 취해서 단지 기억이 안 나는 것일지도 몰라)은 칼바도스다. 나뿐만 아니라 사람들 상당수가 칼바도스에 관한 한 일정한 로망이 있을 것이다. 그건 순전히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소설 『개선문』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불법으로 의사로 활동하는 독일인 라비크가 자주 마시는 술이 칼바도스다. 그는 다리에서 뛰어내려 죽으려 하던 조앙 마두를 사랑하게 된다. 독일에서 나치에 쫓겨 프랑스로 온 그는 외로운 늑대와 같은 사람이었다. 라비크는 칼바도스를 마시지만 조앙 마두는 너무 독하다며 잘 마시지 않는다(고 기억하고 있다). 칼바도스는 노르망디 칼바도스 지역에서 시작된 술이다. 럼이 사탕수수 베이스라면 칼바도스는 사과가 주원료다. 무지하게 독하다.(마셔봤네) 알코올 도수가 40도다.
<개선문>은 루이스 마일스톤 감독이 1948년 만든 영화로 잉그리드 버그만, 샤를 보와이에, 찰스 로튼이 출연한다. (사진=유나이티드 아티스트)
스위스 출신 작가 파스칼 메르시어(피터 비에리)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주인공 그레고리우스가 만나는 붉은 옷의 여인도 비슷한 설정이다. 스위스 베른의 김나지움(대학 예비학교, 우리 식으로는 고등학교와 대학교 사이)에서 고전문헌학을 가르치는 그레고리우스는 강의하러 가는 길에 다리에서 뛰어내릴 것 같은 붉은색 옷의 여인을 구한다. 불어를 쓰는 그녀에게 그레고리우스는 묻는다. “모국어가 뭔가요?” 여자는 답한다. “포르투게스.” 이 일은 결국 그레고리우스로 하여금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타게 한다. 포르투갈의 지난했던 현대사의 안으로 파고들게 만든다. 이 소설은 덴마크 감독 빌레 아우구스트(그 유명한 <정복자 펠레>의 감독)가 2013년에 영화로 만들었다. 붉은 옷의 여인이 남긴 책의 저자인 아마데우 프라두의 시대 스테파니아역으로 멜라니 로랑이 나온다. 그레고리우스 역으로는 제레미 아이언스이다. 영화에서 제레미 아이언스가 야간열차를 타고 책을 읽으며 가는 모습은 유명한 컷이다. 많은 중년들이 그때의 제레미 아이언스처럼 중후한 미남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대부분 절대로 그럴 수 없다.
왜 레마르크의 소설과 메르시어의 소설의 앞단이 비슷한지는 모르겠다. 일종의 오마주였을까. 『개선문』은 1946년,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2004년에 출간됐다. 다 떠나서 책과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레고리우스도 라비크처럼 칼바도스를 마셨을 것 같은 느낌이다. 둘 다 시대의 아픔을 처절하게 경험한다. 그런 고통은 독주로 달래야 한다. 칼바도스가 제격일 것이다. 고통의 계엄을 겪은, 여전히 겪고 있는 우리도, 언제 칼바도스 한잔해야겠다. 한남동이나 청담동 위스키 바에는 있을 것이다. 아 근데 거기 너무 비싸다. 우린 못 간다. 기껏해야 맥주를 피처로 시켜서 콸콸 목으로 붓는 인생들이다. 술꾼도 끼리끼리 노는 법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