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유지웅 기자] 지난해 12월3일 오전 국회에서는 '김장 행사'가 열렸습니다. 우원식 국회의장과 주호영 국회부의장, 여야 의원들이 참석해 요리사 모자를 쓰고 김치를 담가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는 화기애애한 자리였습니다. 그날 1979년 이후 45년 만의 비상계엄을 경험하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윤석열씨와 내란에 가담한 군인들을 빼고는.
(그래픽=뉴스토마토)
오전부터 동시다발 '내란 실행 준비'
2일 <뉴스토마토> 취재를 종합하면,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은 지난해 12월3일 오전 김용현 당시 국방부 장관 공관을 찾았습니다. 나흘 연속으로, 방문 횟수는 지난해 9월부터 당일까지 22차례에 이릅니다.
비상계엄 선포 후 불법 별동수사단인 '제2수사단'을 설치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부정선거 관여 의혹 등을 수사하는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서입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날 오후 이른바 2차 '롯데리아 회동'을 이어갔습니다. 이미 이틀 전, 문상호 정보사령관과 정보사 소속 대령 2명과의 회동을 갖고 계엄을 사전 모의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2차 회동에서 김용군 전 국방부 수사본부장(예비역 대령), 구삼회 육군 기갑여단장(준장), 방정환 국방부 전시작전권전환TF장(준장) 등과 좁은 테이블에서 머리를 맞댔습니다. 그로부터 6시간 뒤 대통령은 계엄을 선포했고, 군은 선관위에 투입됐습니다.
육군특수전사령부 소속 707특수임무단(707특임단)도 분주했습니다. 지휘부는 오후 4시경 특임단의 군장검사를 마쳤고, 발열식량과 물까지 방출했습니다. 김현태 단장은 비상계엄 선포 1시간여 전 '지휘통제실 회의'까지 공지했습니다.
비슷한 시각, '민간인 노상원'으로부터 "선관위 서버를 확보하라"는 지시를 받은 문상호 사령관은 경기 성남시 판교에 정보사 산하 북파공작부대(HID) 요원를 비롯한 30여명을 모이게 했습니다. 노씨 지시에 따라 야구방망이, 케이블타이, 드라이버, 니퍼, 송곳, 망치 등도 구비됐습니다.
윤석열씨는 오후 7시경 조지호 경찰청장과 김봉식 서울경찰청장을 서울 종로구 삼청동 대통령 안전가옥으로 불렀습니다. 윤씨는 '오후 10시 비상계엄 선포'와 '오후 11시 계엄군 접수 대상 기관'이 적힌 A4 용지 한 장짜리 계엄 지시 사항을 조 청장에게 하달했습니다.
지난해 12월3일 육군특수전사령부 소속 707특임단이 국회 본청으로 진입하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한밤의 '비상계엄' 선포…"반국가세력 일거 척결"
윤씨는 결국 오후 10시28분경 "반국가세력을 일거 척결하겠다"며 위헌·위법한 비상계엄을 선포했습니다. '선포 요건'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고 국무회의는 2분 만에 끝나 사실상 심의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선포 후 지체 없이 국회에 알리지도 않았습니다.
국회경비대는 김봉식 서울경찰청장과 목현태 국회경비대장의 지시를 받아 국회 출입구를 봉쇄하고 국회의원의 진입을 막았습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비상계엄 선포에 국회는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됐습니다.
국회 담장 밖에서는 시민과 의원들이, 안에서는 국회 보좌진이 거세게 항의했지만 경찰은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위법 행위다', '어떤 짓을 하고 있는 줄 아느냐'는 외침에도 돌아온 것은 "위에서 내려온 명령"이라는 말뿐이었습니다.
헌법 어디에도 계엄 시 입법부 활동을 제한할 수 있다는 근거는 없지만, 박안수 계엄사령관 명의로 발표된 포고령은 국회를 비롯한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했습니다.
그러나 국회로 들이닥친 계엄군 총칼 앞에 헌법은 무력했습니다. 계엄법에 따라 포고령 위반 시에는 '처단'당할 수 있었습니다.
윤씨가 조지호 청장에게 전화해 "국회 들어가는 의원 체포하라"고 지시했지만, 우원식 국회의장과 이재명 민주당 대표를 비롯한 야당 인사들은 한발 빠르게 국회 담을 넘었습니다. 한동훈 대표와 18명의 국민의힘 의원도 본회의장으로 향했습니다.
계엄군 중 가장 적극적이었던 부대는 707특임단이었습니다. 이들은 민간인을 폭행하고 불법 체포했으며 케이블타이를 '결박용'으로 사용했습니다. 본청 정문에서 보좌진의 격렬한 저항으로 진입이 막히자,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실로 우회해 유리창을 깨고 난입했습니다.
이들의 목적지는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상정하려고 의원들이 모여 있는 국회 본회의장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자신들이 받았다고 주장하는 '국회 봉쇄'의 범주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실제 윤석열씨는 사령관들에게 "의사당 안 사람들 빨리 데리고 나오라", "총을 쏴서라도 문 부수고 끌어내"라고 지시했습니다.
시민과 보좌진이 온몸으로 막아선 덕에, 국회는 비상계엄 선포 다음날 새벽 1시3분경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상계엄 해제가 발표된 시각은 그로부터 3시간이 훌쩍 넘은 4시27분이었습니다. 결의안은 통과됐지만, 애초 최소한의 법적 요건조차 성립하지 않는 비상계엄 선포였기 때문에 안심할 수 없었습니다.
결의안이 통과된 후에도 진입을 시도하던 계엄군들이 있었고, 그들이 철수하는 모습을 보기까지는 한참이 걸렸습니다. 다시 군인이 들이닥칠 수 있다는 우려에 국회의원과 시민들은 쉽게 국회를 떠나지 못했습니다.
무장한 경찰은 중앙선관위 과천청사까지 장악해 계엄군의 전산 자료 탈취 시도를 거들었습니다. 계엄 선포 이후 국회와 선관위 등에 투입된 경찰 병력은 최소 3790명에 달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유지웅 기자 wiseman@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