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을 아십니까." 지난 9월 초, 이름 석 자가 소환됐다.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역사학계의 이단아, 이덕일. 유사역사학의 끝판왕이자 환빠(환단고기 추종자) 신봉자. 정치권에 퍼진 설은 이 소장의 다음 행선지. 다름 아닌 동북아역사재단 후임 이사장.
믿지 않았다. 지라시로 치부했다. 이재명정부의 이덕일 내리꽂기와 역사학계의 내부 반발. 무속 정권 이후 빛의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이재명정부의 환빠 신봉자 임명설. 팩트라면, 그 자체로 인지 부조화. 환단고기 등 유사역사학의 본질은 팽창적 국수주의다. 비합리성이 판치는 극단적 민족주의다. 일본의 역사 왜곡과 무엇이 다른가.
환빠 논쟁 쏘아 올린 이 대통령
그로부터 3개월. 미스터리 일부가 풀렸다. 환빠 논쟁의 공을 쏜 이재명 대통령. 그는 지난 12일 부처 업무보고에 참석한 박지향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에게 "무슨 환빠 논쟁이 있죠"라고 물었다. 박 이사장이 "잘 모르겠다"고 하자, 이 대통령은 "동북아역사재단은 특별히 관심이 없었던 모양", "환단고기는 문헌이 아니냐"라며 면박을 줬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환단고기는 단군왕검 신화에 등장하는 환인·환웅 등이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했다는 위서 중 위서 아닌가. 환빠 명분은 주류 역사학계의 식민사관화. 속내는 실증사학에 대한 공격을 통해 자기 장사를 하는 역사 상업주의. 애초 그들에게 민족주의 따위는 없다. 환단고기를 간행한 이유립은 숱한 친일 논란에 휩싸였다.
박 이사장에 대한 면박이 교체의 복선인 건 알겠는데, 그 도구로 왜 환단고기를 꺼냈나.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을 바꾸려다가, 역사 주류학계가 교체될 판이다. 환단고기는 환상적 민족주의에 물든 '판타지'다. 짜깁기다. 파생하는 부작용. 정치를 좀 먹는 음모론. 자칭 재야 사학으로 규정하나, 본질은 허구다.
그들의 관심은 사실 규명이 아닌, 원하는 목표를 찾아내는 것. '주류 사학=식민사관' 프레임에 가두니, 주류 역사학자들이 고대사의 미스터리를 숨겼다는 명제가 튀어나왔다. 그 결과는 인류 최초의 수메르 문명조차 환국이 만들었다는 황당한 논리.
그래서 후임자는 누구입니까
명백한 퇴행이다. 일본 제국주의 논리의 판박이 아닌가. 이승만정부의 '일민주의'나 전두환의 우민화 정책 '국풍81' 등의 뿌리도 유사역사학. 유사역사학은 보수·진보를 가리지 않았다. 분단 체제의 특수성 탓에 민족주의가 진보적 가치로 둔갑하자, 1980년대 민족자주파(NL) 역시 유사역사학을 저항 의식으로 치부했다. 민주당 내 환빠가 많은 이유.
하지만 유사역사학은 그 자체로 비과학적이다. 집단적 환상만 자극한다. 객관적 사료 없이 9000년 전 유라시아의 땅이 우리 것이라는 것을 믿어야 하나. 어쩌자는 건가. 전쟁이라도 해서 찾아오자는 건가. 유사역사학의 결론은 늘 호전성으로 끝난다.
연속성도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단절됐다. 역사학자 E.H. 카의 통찰인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를 거부한다. 1911년 이전 존재한 사료가 없는데도 믿으란다. 한학자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통일교) 총재가 문선명 죽음 이후 스스로 '독생녀'로 칭하자, 유일한 구원자적 개념이 환생한 것과 같다. 사이비의 집단적 환상은 누군가에겐 실재한다.
불길하다. 신화를 과학으로 포장하려는 시도가. 역대 정권마다 역사의 후퇴는 민심의 역린으로 작용했다. 이명박(MB)정부의 뉴라이트 건국절 논쟁, 박근혜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윤석열정부의 육군사관학교 내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등이 대표적.
정교유착 논란은 옵션. 환단고기는 증산도 계열인 대순진리회의 한 축. 더구나 대장동 자금이 대순진리회 측에 흘러 들어갔다는 의혹까지 불거지지 않았나. 환빠 논쟁의 일단락은 간명하다. '음모론적 세계관을 신봉하냐, 안 하냐'의 문제다. 역사를 유린하는 반지성주의에 반대한다. 유사역사학을 국정에 끌어들이려는 시도를 거부한다. "그래서 동북아역사재단 후임 이사장은 이덕일입니까, 아닙니까."
최신형 정치정책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