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메이커도 쉽지 않다

(황방열의 한반도 나침반)북한, 중국·러시아와 '더 밀착'

입력 : 2025-12-23 오전 6:00:00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아시안 순방 일정을 마치고 지난 10월30일 한국을 떠나면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만나기 위해 연락했느냐'는 질문에 "내가 너무 바빠서 우리는 대화할 기회가 없었다"면서 "나는 다시 오겠다. 김정은과 관련해서는 다시 오겠다"고 했다.
 
이렇게 떠난 트럼프가 김정은과 회동할 수 있는 시점은 '내년 4월쯤'이 가장 유력하게 점쳐진다. 트럼프가 직접 내년 4월에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회담한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지난 19일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열린 외교부(재외동포청)·통일부 업무보고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지난 18일 민주평통(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강연에서 내년 4월을 "관건적 시기"라며 이를 계기로 북·미 정상이 만난다면 "남북 대화와 남북 교류의 공간도 만들어질 수 있다"고 한 것도 이런 배경이다. 정 장관은 "내년 4월을 놓치고 나면 그다음에 계기를 만드는 건 현재로서는 쉽지 않아 보인다"면서 "중개자, 촉진자가 필요하다. 이게 한국과 중국이 해야 할 일"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다음날 통일부 업무보고 직후 언론 브리핑에서도 "완전한 남북 관계 단절 시대에 어떻게든 바늘구멍이라도 뚫어라, 하는 것이 대통령의 명령"이라며 "통일부 희망으로는 내년 4월 트럼프 대통령 방중 계기 전후에 북·미 정상회담이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스토커 같다'는 평까지 나오는 트럼프의 구애에도 김정은이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일방적 희망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국정원 "북·미회담 가능성 커…내년 3월 이후가 정세 분기점"
 
지난 10월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계기 북·미 정상 회동이 불발된 직후, 국가정보원은 "물밑에서 북한이 미국과의 대화를 대비해둔, 동향이 다양한 경로로 확인되고 있다"고 공개했다. 트럼프가 아시아 순방 때 김정은과 만나겠다는 의향을 표명한 상황에서 북한이 대화 여지를 감안해 최선희 북한 외무상의 방러 출국을 막판까지 고심했으며, 미국 내에 있는 국제-대북 일꾼들과 여러 지도적 인사들에 대한 정보를 최근 들어 많이 축적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북·미 정상회담이 이뤄질 가능성이 작지 않으며 내년 3월 한·미 연합훈련 이후가 정세 분기점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근에도 북한은 마음에 들지 않는 뉴스에 대해서는 험악한 소리를 마다하지 않아왔으나, 국정원의 이 공개에는 아무 반응을 하지 않았다. 미국 내 동향에 밝은 것으로 알려진 빅터 차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 석좌도 지난 19일, 북·미 정상이 내년 1분기에 만날 가능성을 "60% 정도"라고 전망했다. 
 
트럼프는 역대 어느 미국 대통령과 비교할 수 없이 북한과의 정상회담 의지가 강하다. 그래서 트럼프가 '피스 메이커'(평화 중재자)로 전면에 나서고 이재명 대통령이 '페이스 메이커'(보조자) 역할을 맡아 국면을 추동해 나가겠다는 것이 현 정부의 구상이다.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가 표방한 '한반도 운전자론', '중재자론'에서 한발 뒤로 물러난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 역시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우선 북·러 관계와 북·중 관계가 한층 고도화됐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지난 3일 '대북 제재 10년, 북한경제' 주제 포럼에서 위성 이미지를 분석한 결과, 북한의 올해 1~3분기 야간 조도 지표가 2021년의 약 7배 수준으로 나타났다고 공개했다. 올해 야간 조도 상승이 두드러졌는데, 북한의 전력 생산과 효율 모두 개선됐을 가능성이 있으며 조명용 전력 소비 경향 자체도 증가했다는 것이다. 또 여러 위성 정보를 종합해 볼 때 올해 북한 제조업이 작년보다 높은 성장률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장기간 국제 제재·봉쇄 상태인 북한에서 어떻게 이런 변화가 나타났을까. 북·러 협력이 그 배경으로 분석된다. 북한과 러시아는 지난해 6월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을 체결한 데 이어 북한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러시아를 지원해 사단급 이상 병력을 파병하면서 '혈맹' 관계가 됐다. 최근에는 북한이 러시아 드론 제조 공장에 1만명 규모의 여성 노동자를 파견할 전망이라는 보도까지 나왔다.
 
북한의 우크라이나 파병으로 다소 소원한 상태였다던 북·중 관계도 회복됐다. 지난 9월 중국전승절 행사에 김정은이 직접 참석하고, 시진핑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버금가는 급으로 극진하게 환영한 것이 계기가 됐다. 지난 11월 북·중 무역이 6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한 것도 이 같은 분위기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현재 외교 상황을 '핵을 가진 정상 국가'라는 목표가 가능한 국면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지난 2019년 6월30일 판문점서 만난 북·미 정상. (사진=연합뉴스)
 
미 국방정보국 "북한, 수십 년 만에 가장 강력한 전략적 위치"
 
군사력 고도화도 큰 요인이다. 미 국방부 산 정보기관인 국방정보국(DIA)은 지난 5월에 낸 '2025년 세계 위협 평가' 보고서에서 "북한은 동북아시아의 미군과 동맹국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군사력을 보유했고 북한이 점점 더 정교해지는 무기로 미국 본토를 위협할 능력을 키우고 있다"고 평가했다. 풍계리 핵실험장을 복구한 후 언제든지 7차 핵실험을 실시할 준비가 돼 있으며, 생화학전 프로그램 보유 가능성도 높다는 것이다.
 
이 같은 대량살상무기(WMD) 능력 확장과 함께 우주와 사이버 공간에서도 비대칭 전쟁 능력을 향상시키고 있다고 평가했다. DIA는 북한의 외교적 위상 향상과 군사력 강화 상황을 종합해 "북한이 수십 년 만에 가장 강력한 전략적 위치에 있다"고 표현했다. 
 
그만큼 김정은의 몸값이 높아진 것이다. 2018년에 트럼프를 만나기 위해 베트남 하노이까지 열차 길 4500km를 66시간 달려가야 했던 김정은이 아니라는 얘기다. 당시 북·미 정상회담이 트럼프의 결단으로 가능했다면, 2026년의 북·미 정상회담은 김정은이 키를 쥐고 있다. 
 
물론 이 같은 구상이 가능해지려면 우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문제가 가닥을 잡아야 한다. 현 상황에서는 트럼프와 김정은이 만난다 해도 의미 있는 성과를 도출해 내기는 어렵다. 직접 총부리를 맞대지는 않았지만 미국과 북한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맞서고 있는 상황이 종결되지 않으면, 의미 있는 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미국 내 동의를 구하기는 어렵다.
 
최근 한국 외교부의 북핵 관련 당국자가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외무부 북핵 담당 특임대사 등 북핵 당국자를 비공개로 만난 것도 우크라이나전 종전 이후 상황을 준비하기 위한 포석일 것이다. 
 
황방열 통일외교 전문위원 bangyeoulhwa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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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철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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