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변소인 기자] 고물가와 불경기가 맞물리며 소비자들의 지갑이 닫혔습니다. 생활비 부담이 커진 가계가 소비를 줄이면서 내수 시장은 좀처럼 회복 기미를 보이지 못했습니다. 중견·중소기업들은 실적 반등보다는 현상 유지를 선택했습니다. 비용 부담은 커지고 수요는 줄어드는 상황에서 기업들은 버티는 것 자체를 경영 목표로 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미지=챗GPT)
29일 중소기업계에 따르면 고금리 기조가 장기화된 가운데 경기 회복이 지연되면서 내수와 제조업 비중이 높은 중소기업들이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체감 경기 악화가 더욱 크게 작용한 한 해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소비자들이 지출을 줄이면서 내수 시장이 급격히 위축됐고 이에 따라 소비재를 생산하는 중소 제조업체들의 실적 하락이 잇따랐습니다. 고정비 부담이 큰 제조업 특성상 생산량이 줄어들어도 비용을 즉각 줄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일부 기업들은 매출 감소보다 영업이익 하락 폭이 더 크게 나타나며 체력 소진이 가속화된 것으로 분석됩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국가데이터처 통계를 분석해 발표한 '최근 소매판매 현황과 시사점'에 따르면 올해 1~3분기 소매판매액 경상지수 누적 증가율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9% 증가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자동차 판매 호조 영향이 컸습니다. 자동차 판매가 저조했던 지난해의 기저 효과와 고가 친환경차 판매가 반영된 수치입니다. 가전제품, 기타 준내구재(침구류·주방용품 등), 화장품 등은 둔화했습니다. 한국경제인협회가 매출액 기준 600대 기업을 대상으로 기업경기실사지수(BSI)를 조사한 결과 2026년 1월 BSI 전망치가 95.4를 기록했습니다. BSI 전망치는 2022년 4월 99.1을 기록한 이후 3년 10개월 연속 기준선 100을 하회하고 있습니다. BSI가 기준치인 100보다 높으면 전월 대비 경기 전망이 긍정적이고 100보다 낮으면 부정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픽=뉴스토마토)
생활필수품을 생산하는 영세 제조업체들의 상황은 더욱 절박했습니다. 한 화장지 제조업체는 해외에서 원자재를 수입해 국내에서 가공해 판매하는 구조를 갖고 있는데요. 원자재 가격 인상과 고환율, 인건비 상승 등 비용 부담이 올라도 생필품이라는 특성상 제품 가격을 손쉽게 인상하지 못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특히 대형 유통 채널과의 거래 구조는 가격 인상 여지를 더욱 제한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가격 경쟁이 극심한 유통 환경에서 중소 제조업체들은 원가 부담을 감내한 채 납품을 지속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설비 투자 구조 역시 기업들의 부담을 키우고 있습니다. 인건비 상승에 대응하기 위해 생산 설비를 대형화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습니다. 생산량을 확대해 투자비를 상쇄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입니다. 그러나 대형화된 설비로 생산량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기계를 가동할 때마다 대량의 제품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습니다. 불경기 속에서 인상된 가격으로 제품을 판매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보니 결국 가격 경쟁력을 맞추기 위해 저가 판매에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익성은 오히려 악화되고, 늘어난 생산량을 소화하기 위한 추가 비용 부담이 다시 기업에 전가되는 악순환 구조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이런 요인으로 영세 제조업체들의 경영 압박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중소 화장지 제조업체 대표는 "이런 식이면 얼마나 영업을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며 "빚더미에 앉은 영세 업체들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해외에서 저가 공세를 펴고 있는데 국내 생산업체들은 그에 대응할 만한 단가를 만들어내기 힘든 구조"라며 "내년이면 최저임금도 올라서 인건비가 또 오르게 생겼다"고 하소연했습니다.
불경기의 여파는 건설 경기 침체를 통해 후방산업으로도 확산되고 있습니다. 건설 경기가 사실상 얼어붙으면서 건자재와 도료, 가구 등 관련 산업에 속한 중소기업들의 실적 하락이 잇따랐습니다. 건설 경기는 특성상 착공 이후 일정 시간이 지나서야 후방산업에 영향을 미칩니다. 최근 몇 년간 이어졌던 착공 공백이 올해부터 건자재 업계에 본격적으로 반영되기 시작했고 이 영향은 내년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가구 업계 역시 비슷한 흐름을 보이고 있습니다. 매트리스 일부 품목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실적 부진이 이어지고 있으며 주택 거래 감소와 이사 수요 축소가 직접적인 타격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흐름은 중소기업 전반의 체력 저하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내년 이후입니다. 이미 체력이 상당 부분 소진된 상황에서 대내외 환경 변화가 겹칠 경우 중소기업들의 부담은 더욱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노민선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중소기업정책연구실장은 "2023년 이후 경기가 많이 꺾여서 힘든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는 중소기업들이 잘 버텼다"며 "다만 지금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라고 평가했습니다. 노 실장은 "내년에는 글로벌 환경 변화가 예상되면서 가격 경쟁력에 대한 이슈가 더 불거질 가능성이 크다"며 "정부가 중소기업의 불확실성을 줄 일 수 있는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정책 지원의 사각지대도 해소하는 노력 또한 필요하다"고 조언했습니다.
변소인 기자 byline@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