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신년기획)연장은커녕…60세 정년도 못 채우는 ‘강제 졸업생들’

‘정년 연장’ 기업 난색에 표류돼
정년 채우는 근로자 17% 그쳐
LG·현대·은행 희망퇴직 칼바람

입력 : 2026-01-07 오후 4:12:18
 
[뉴스토마토 백아란 기자] “갑 티슈에서 티슈를 한 번 다 뽑아보겠어요? 그리고 상자에다가 직원들 이름 넣고 잘 흔든 다음에 스무 개만 뽑아보세요. 우리 그 사람들 내보냅시다.”
 
지난해 방영한 JTBC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속 인사팀장 대사입니다. 생산 공장 구조조정 대상자를 추려내지 못하자 이런 방식을 제안한 것으로, 드라마는 대기업 부장으로서 성공한 인생이라 자부하던 50대 주인공이 한순간에 직무에서 배제되고 사회로 밀려나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그려냈습니다. 이 드라마 속 현실이 오늘날 기업 현장에서는 여전히 ‘일상’이 되고 있습니다.
 
테헤란로를 따라 늘어선 서울 강남구의 고층 건물들. (사진=연합뉴스)
 
정부와 정치권이 저출생·고령화와 연금 크레바스(퇴직 후 국민연금 수령 전까지 소득 공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년 65세 연장’ 카드를 꺼내들었지만 실제 기업 현장에서는 있는 정년조차 챙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7일 고용노동부의 ‘고용형태별 근로실태조사(5인 이상 사업체의 상용근로자 기준)’와 국회미래연구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024년 노동자 평균연령은 44.2세이며 근속연수는 6.8년으로 집계됐습니다. 법정 정년까지 근속하는 임금노동자 또한 전체의 17.7%에 불과한 상황입니다.
 
특히 1차 베이비부머(1955~1963년생)의 주된 일자리 평균 퇴직연령은 52.9세로 나왔고 후기 2차 베이비부머(1964~1969년생)는 46.9세로, 법적 정년인 60세보다 많게는 13년 이상 조기 퇴직을 했습니다. 한국의 법적 정년은 현재 만 60세지만, 정년을 다 채우지 못하는 사례가 빈번한 것입니다.
 
국내 주요 기업들의 평균 근속연수는 지난 2024년 기준 SK가 11년에 그쳤고, 삼성전자와 LG전자는 13년으로 나왔습니다. 현대차의 경우 평균 근속연수가 2023년 17년에서 2024년 16년으로 줄었습니다. 같은 기간 연령별 임직원 수를 보면 SK의 50세 이상 임직원은 1017명으로 11.9% 감소했으며 현대차는 3만5554명에서 3만4441명으로 3.13% 줄었습니다.
 
과거 경영난에 시달리는 한계기업 등에 국한됐던 인력 감축도 국내 굴지의 대기업까지 확대되는 실정입니다. 주요 기업들은 ‘인력 효율화’라는 이름 아래 대규모 희망퇴직을 연례행사처럼 치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 LG전자는 지난해 3분기 TV 사업을 담당하는 MS사업본부를 시작으로 희망퇴직을 포함한 전사 차원의 인력 구조조정을 실시했으며, LG화학은 석유화학사업본부와 첨단소재사업본부 직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받았습니다.
 
LG유플러스는 지난해 희망퇴직을 통해 약 1500억원 규모의 일회성 비용을 반영하는 인력 구조조정을 단행했고, SK브로드밴드는 지난해 두 차례에 걸쳐 희망퇴직을 실시했습니다.
 
자동차 업계에서는 현대차그룹의 핵심 부품사인 현대모비스가 만 50세 이상 사무·현장직 노동자를 대상으로 사실상 희망퇴직 절차인 ‘리스타트 프로그램’을 시행했고 아모레퍼시픽그룹은 지난 2020년 이후 5년 만에 전사를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받으며 재계의 희망퇴직 칼바람에 동참했습니다.
 
(인포그래픽=뉴스토마토)
 
금융권의 희망퇴직 연령 노선은 더 낮아지고 있습니다. 하나은행은 지난 5일까지 만 40세 이상 직원을 대상으로 특별퇴직(희망퇴직)을 받았으며 임금피크제 특별퇴직도 1970년 상반기생 직원을 대상으로 실시됐습니다. 신한은행은 지난 12월 만 40세 이상 직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 신청을 받았고 농협은행도 희망퇴직 신청을 받아 446명을 내보냈습니다.
 
현장에서는 직무 배제, 임금 피크제와 결합된 퇴직 압박 등 교묘한 방식을 통해 법적 정년을 무력화하는 관행이 자리 잡았다는 비판도 나옵니다. 대기업 임원으로 퇴직한 A씨는 “관리직이었던 인력을 단순 업무로 배치하거나 아예 직무를 부여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며 “후배들 눈치도 보이고 지금 나가면 몇 개월치 임금을 위로금으로 주지만, 내년에 퇴직하면 챙겨주지 않을 것이라는 시그널을 받으면 나갈 수밖에 없다”고 분위기를 전했습니다.
 
기업 정년 시계가 빨라지면서 정치권에서 논의 중인 ‘정년 연장’ 이슈는 공허한 메아리에 그칠 수 있다는 우려도 큽니다. 실제 인건비 부담 증가와 청년 고용 위축을 이유로 기업에서 난색을 표하면서 관련 입법은 표류 중인 상태입니다.
 
전문가들은 ‘희망퇴직’ 등으로 정년을 다 채우지 못하는 사례도 빈번한 만큼 단순 정년의 연장을 넘어 고령자 고용 안정에 대한 확장된 논의를 이어가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특히 우리나라보다 먼저 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일본의 사례를 참고해 퇴직 후 재고용과 같이 숙련된 인력을 유연하게 활용하는 방안도 제시됐습니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고령화나 연금 크레바스 문제 등을 고려할 때 정년 연장은 거부하기 어려운 정책 과제”라면서도 “현재는 60세 정년도 보장하기 힘든 여건”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 교수는 “법적 정년 연장만으로 좁혀서 접근하거나 자율 시행 등에 맡길 경우 대기업이나 공공기관 등에만 혜택이 적용될 수 있어, 또 다른 노동시장 격차가 발생할 수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이어 “일본의 경우 다원화된 방식을 활용하고 있는데 우리 또한 노인 경제활동의 지속성을 확보하는 데 초점을 두고 청년 고용과 임금 체계 개선 등 보완책이 함께 이뤄져야 하고,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얽힌 사안인 만큼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김성희 산업노동정책연구소 소장(전 고려대 노동대학원 교수)은 “중소기업에 정년 연장 제도를 우선 도입하는 방안이나 소득 공백 해소에 초점을 둔 방안, 재고용 방식을 배합하는 방식 등을 검토할 수 있다”며 “정책을 추진함에 있어 세대 간 상생 고용 모델을 도입하는 등 보완 패키지와 함께 기업이 직무 배제 등 교묘한 방식으로 압박할 경우에는 정년 연장 지원을 배제하는 방식도 고려할 만하다”고 했습니다.
 
백아란 기자 alive0203@etomato.com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
백아란 기자
SNS 계정 : 메일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