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파고 속에서 영국은 금융기관의 도덕적 해이와 단기 성과주의를 반성하며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라는 개념을 탄생시켰다. 타인의 자산을 맡은 기관투자자가 마치 주인의 재산을 돌보는 집사(Steward)처럼, 고객과 수익자의 이익을 위해 기업가치 제고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이 원칙은 전 세계 자본시장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 역시 2016년 12월, ‘기관투자자의 수탁자 책임에 관한 원칙’이라는 이름으로 한국형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했다. 그러나 도입 9년이 지난 지금, 우리 자본시장의 ‘집사’들은 과연 그 책무를 다하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그간 한국형 스튜어드십 코드의 실효성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유명무실’에 가까웠다. 2025년 12월 현재 249개 기관이 참여하고 있지만, 이들이 원칙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 점검하는 절차는 전무했다. 많은 기관이 국민연금 위탁운용사 선정 시 가점을 받기 위해 이름만 올린 채, 형식적인 보고서조차 제출하지 않는 ‘무임승차’ 행태를 보여온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난 12월29일, 금융위원회와 한국ESG기준원 등 관계 기관이 발표한 ‘스튜어드십 코드 내실화 방안’은 만시지탄이나 매우 환영할 만한 변화의 신호탄이다.
이번 내실화 방안의 핵심은 그동안 시장 자율에만 맡겨졌던 코드 이행을 체계적인 ‘점검’과 ‘공시’의 영역으로 편입했다는 점이다.
첫째, 이행 점검 절차가 신설된다. 앞으로 참여 기관은 12개 점검 항목에 대해 자체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며, 이는 한국ESG기준원의 실무 점검을 거쳐 ‘스튜어드십 코드 발전위원회’가 최종 의결하게 된다. 이는 단순히 선언에 그치지 않고, 정책 수립부터 의결권 행사, 주주 관여 활동에 이르기까지 실질적인 이행 여부를 검증하겠다는 관계 기관들의 의지가 반영된 대목으로 평가된다.
둘째, 정보의 투명성과 비교 가능성이 대폭 강화된다. 각 기관 홈페이지에 산재해 있던 이행보고서들이 ‘스튜어드십 코드 홈페이지’에 통합 공시되며, 항목별 이행 여부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종합점검보고서’가 제공된다. 이는 자산소유자(연기금)와 최종 수익자인 국민이 기관투자자의 활동을 감시하고 평가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다.
셋째, 글로벌 정합성을 높이기 위한 코드 개정이 추진된다. 수탁자 책임의 범위를 기존 지배구조(G) 중심에서 환경(E), 사회(S) 등 ESG 요소 전반으로 확대하고, 적용 자산 또한 상장주식에서 채권, 부동산, 인프라 등으로 넓히는 방안이 검토된다. 이는 기후변화 대응 등 지속가능성 이슈가 투자의 핵심 리스크로 부상한 글로벌 흐름을 반영한 시의적절한 조치다.
이번 개선안은 제도의 구속력을 높이고 시장 규율을 강화한다는 측면에서 분명 진일보했다. 그러나 영국이나 일본 등 선진국 사례와 비교할 때, 한국의 스튜어드십 코드가 진정한 ‘자본시장의 파수꾼’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몇 가지 근본적인 과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먼저, 협력적 관여 활동(Collaborative Engagement)을 위한 법적 불확실성을 해소해야 한다. 해외에서는 기관투자자들이 연대해 기후위기나 지배구조 문제에 대해 기업에 공동 대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반면 한국에서는 이런 연대 활동이 자본시장법상 ‘의결권 공동 행사’로 해석되어 엄격한 대량보유 보고의무(5% 룰)를 적용받을 위험이 크다. 영국금융감독청(FCA)이 일회성 논의는 규제 대상이 아님을 명확히 하고 일본이 중요 경영 사항에 대한 합의가 없는 한 공동보유자에 해당하지 않도록 법을 개정한 것처럼, 우리도 기관투자자들이 법적 리스크 없이 협력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다음으로, 수탁자 책임 활동의 범위와 깊이를 확장해야 한다. 현재 한국의 스튜어드십 코드는 의결권 행사에 치중된 경향이 있다. 영국의 경우 2020년 코드 개정을 통해 스튜어드십의 정의를 ‘자산의 배분, 관리 및 감독’까지 확장하고, 결과(Outcome) 중심의 보고를 의무화했다. 단순히 “정책이 있다”고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책을 통해 어떤 활동을 했고, 어떤 변화를 이끌어냈는지”를 설명해야 한다(Apply and Explain). 우리도 이번 개정을 통해 단순한 지침 마련을 넘어, 실제 기업과의 대화 내용과 성과를 구체적으로 공개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독립적이고 강력한 감독 기구의 역할 또한 필수적이다. 영국은 재무보고위원회(FRC)가 매년 보고서를 심사해 수준 미달 기관의 서명 자격을 박탈하는 등 강력한 권한을 행사한다. 반면 우리는 민간기구인 발전위원회가 그 역할을 맡게 되므로, 시장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금융당국의 확실한 지원과 연계가 필요하다. 금융위원회나 금융감독원이 참여 자격을 관리하거나, 최소한 점검 결과가 연기금의 위탁운용사 선정 시 실질적인 인센티브·패널티로 작동하도록 제도화해야 한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단순히 기관투자자를 규제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이는 기업의 장기적 가치를 높여 국민의 노후자금을 지키고, 자본시장의 건전한 성장을 이끄는 선순환의 고리다. 9년 만에 찾아온 이번 내실화 방안이 단순한 ‘체크리스트’ 작성에 그치지 않으려면, 기관투자자들의 인식 전환이 선행되어야 한다.
기관투자자들은 이번 변화를 부담으로 느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문성을 입증하고 고객의 신뢰를 얻을 기회로 삼아야 한다. 2026년부터 시작될 이행 점검은 그동안 잠자고 있던 ‘집사’들을 깨우는 알람이 될 것이다. 정부와 관련 기관 또한 형식적인 점검에 그치지 말고, 시장에 명확한 신호를 줄 수 있는 실효성 있는 운영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영국이 수차례 개정을 거쳐 스튜어드십 코드를 정착시킨 것처럼 우리도 이번 내실화를 시작으로 끊임없이 제도를 보완해 나가야 한다. 향후 적절한 제도적 보완과 시장 참여자들의 적극적인 실천이 어우러져, 스튜어드십 코드가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와 자본시장 선진화의 든든한 초석이 되기를 기대한다.
윤태준 한국ESG연구소 거버넌스본부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