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자본시장의 고질적 과제인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이 시행되고, 상법 개정을 통해 주주의 권리 보호를 강화하는 법적 기반도 마련되었다. 하지만 제도 개선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소액주주가 실질적으로 권익을 보호받을 수 있는 구조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시장의 신뢰는 근본적으로 회복되기 어렵다. 최근 학계와 실무계를 중심으로 대만의 증권선물투자자보호센터(SFIPC)와 유사한 기관 설립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것은 이런 맥락에서 매우 시의적절하다. 다만 제도 도입에 앞서 대만의 경험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SFIPC는 분명 성공적인 모델이지만, 20년 넘는 운영 과정에서 드러난 문제점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SFIPC는 2003년 ‘증권투자자 및 선물거래자 보호법’에 근거해 설립된 비영리법인으로, 대만 증권거래소와 시장 참여자들이 출연한 기금으로 운영된다. 설립 당시 약 10억 대만달러였던 기금은 현재 90억 대만달러를 넘는 규모로 성장했다. 이 기관의 가장 큰 특징은 광범위한 권한이다. 단순한 상담과 조정을 넘어 집단소송 제기, 대표소송 수행, 이사 해임소송까지 가능하다. 20명 이상의 투자자 위임만 받으면 센터 명의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으며, 소송 비용은 기금에서 선지급한다. 투자자들은 승소 시에만 배상금에서 비용을 부담하면 된다. 더 나아가 SFIPC는 모든 상장사의 주식 1000주씩을 보유하며 적극적인 주주행동주의를 실천한다. 2024년 한 해에만 81개 주주총회에 참석해 과도한 이사 보수, 불합리한 배당정책 등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투자자 보호 기관이 피해 구제를 넘어 시장 감시자 역할까지 수행하는 것이다.
성과도 인상적이다. 2024년 6월 기준 305건의 집단소송을 제기했고, 18만5000명 이상의 투자자를 대리했다. 청구 총액은 799억 대만달러에 달하며, 실제로 투자자들에게 회수해준 금액은 76억 대만달러를 넘는다. 한국의 증권 집단소송이 20년간 12건에 불과한 것과 비교하면 놀라운 수치다. 2020년 대동(TATUNG) 사건은 SFIPC의 역할을 극명히 보여준다. 100년 넘게 가족이 경영권을 장악한 이 회사에서 주주총회 당일 53% 지분을 가진 주주들이 의결권을 박탈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SFIPC는 즉각 대응에 나섰고, 금융감독위원회의 조치와 맞물려 결국 외부 투자자들이 경영권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이런 성과는 SFIPC가 단순한 피해 구제 기구를 넘어 기업지배구조 개선의 실질적 추동력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SFIPC 모델에도 구조적 한계가 존재한다. 가장 큰 문제는 역할 충돌이다. SFIPC는 정부 감독을 받는 준정부기관이면서도 독립적으로 강제 조정을 수행하고, 집단소송을 제기하며, 이사를 해임한다. 이처럼 다양한 기능이 한 기관에 집중되면서 독립성과 중립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책임성 확보도 과제다. SFIPC가 소송을 제기하고 화해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어떤 기준을 적용하는지, 누가 이를 감독하는지 명확하지 않다. 실제로 전체 회수액의 83%가 화해를 통해 이뤄졌는데, 화해 전략은 사업 기밀로 취급된다. 또한 대만의 집단소송은 대부분 내부자거래 형사 기소와 동시에 진행되어, 형사 기소가 실패하면 민사소송도 함께 무너지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독립적인 민사 구제 경로 확보가 필요한 이유다. 패소 시 비용 부담 구조도 문제다. SFIPC가 패소하면 피고의 소송 비용이 집단 구성원에게 부과된다. 소송 진행을 통제할 수 없는 투자자들이 패소 비용까지 부담해야 하는 셈이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한국형 투자자보호센터 설립 논의가 학계와 실무계에서 거론되고 있다. 지난 25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국민은행 스마트딜링룸에서 딜러들이 업무를 보고 있다. (사진=뉴시스)
한국형 투자자보호센터를 설립한다면 대만의 성공 요소는 수용하되 제도적 결함은 반드시 보완해야 한다. 정부 및 업계로부터 독립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보장하고, 명확한 감독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조정, 소송, 보상 등 각 기능 간 경계를 명확히 해 이해상충을 방지할 필요가 있다. 처음부터 모든 권한을 부여하기보다는 상담과 조정 기능으로 시작해 운영 경험을 축적한 후 집단소송 권한을 단계적으로 확대하는 방안도 검토할 만하다. 패소 시 비용을 투자자에게 전가하는 구조는 지양하되 소송 남용 방지 장치 마련이 요구된다. 형사 기소와 독립적인 민사 구제 체계 구축, 국민연금 등 기관투자자와의 협력, 재벌 구조에 대응할 전문성 확보도 중요하다.
투자자보호센터는 단순한 피해 구제 기구가 아니다. 시장 신뢰의 핵심 인프라이자, 기업지배구조 개선의 촉매다. SFIPC가 20년간 보여준 성과는 이를 증명한다. 다만 제도의 성공은 설계만큼이나 운영이 중요하다. 대만의 경험은 완벽한 제도란 존재하지 않으며, 지속적인 개선이 필수라는 점을 보여준다. 한국이 투자자보호센터를 도입한다면, 대만의 성공과 실패를 모두 거울삼아 한국 자본시장의 특수성을 반영한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하지만 소액주주가 실질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마련된다면, 시장의 신뢰는 조금씩 회복될 것이다. 투자자보호센터는 그 여정의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윤태준 한국ESG연구소 거버넌스본부 팀장
※ 본고의 견해와 주장은 필자 개인의 것이며, 한국ESG연구소의 공식적인 견해가 아님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