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규모 해킹 사태 이후 통신시장은 숫자로만 보면 요동쳤다. 가입자는 움직였고, 점유율은 흔들렸으며, 한때 40% 독주 체제라 불리던 질서는 깨졌다. 하지만 조금만 거리를 두고 보면 이번 가입자 이동은 '사건'이 아니라 '구조'에 가깝다.
지난해 상반기, 해킹 여파로 이탈한 고객을 흡수하며 순증을 기록한 KT는 이를 성장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그 순증은 신뢰 이전의 결과라기보다 불안 이전의 산물에 가까웠다. SK텔레콤 유심 해킹 당시 KT는 '가만히 있는 것이 가장 위험한 선택'이라는 식으로 불안을 자극하는 메시지를 앞세워 경쟁사 가입자 유치에 나섰고, 그 결과 지난해 기준 24만명의 순증을 기록했다. 숫자는 늘었지만 기반은 취약했다.
문제는 이 같은 장면이 올해 다시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KT 위약금 면제가 시행되자 이번에는 경쟁사들이 KT 해킹을 겨냥한 비방 마케팅에 나섰다. 일부 대리점에서는 'KT 해킹 사태 아직도 남아 계세요?'라는 문구를 전면에 내걸었고, 회사는 불안 조성 마케팅을 자제하라는 가이드를 배포했다고 설명했지만 현장에서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공포 마케팅으로 순증을 쌓았던 KT가 이제는 같은 방식의 경쟁을 문제 삼아 규제 기관에 호소하는 장면은 통신시장 경쟁의 구조적 한계를 그대로 드러낸다.
이 과정에서 고객은 여전히 선택의 주체라기보다 이동을 증명하는 숫자로 소비된다. 어느 통신사가 더 안전한지, 더 책임 있는 대응을 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충분하지 않았고, 대신 '지금 옮기면 이득'이라는 메시지만 반복됐다. 통신시장이 수차례 해킹을 겪고도 같은 방식의 경쟁으로 되돌아간 이유다.
보안 사고 이후 통신사들이 가장 먼저 꺼내 든 카드는 재발 방지나 책임 설명이 아니라 지원금과 조건 경쟁이었다. 사고의 원인과 대응을 비교하기보다 당장의 손해를 줄이는 쪽으로 시장이 움직이면서 보안은 다시 '비용'이 아닌 '마케팅 변수'로 소비됐다. 신뢰를 회복할 기회가 있었지만 통신사들은 또다시 가장 쉬운 경쟁 방식으로 돌아갔다.
가입자 이탈은 일시적일 수 있다. 하지만 신뢰의 붕괴는 누적된다. 해지율 상승은 곧 비용 증가와 실적 압박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무리한 마케팅으로 연결되는 악순환을 만든다. 특정 사업자의 문제가 아니라 통신 3사 모두가 이미 경험했고 또 반복하고 있는 경로다.
해킹은 사고였다. 그러나 그 이후의 이탈과 경쟁 방식은 선택이었다. 통신시장이 또 한 번 '숫자의 승부'로 귀결된다면, 다음 위기는 다시 예고 없이 찾아올 것이다.
이지은 테크지식산업부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