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지은 기자] 유럽연합(EU)이 통신·디지털 인프라 규제의 틀을 전면 재편하는 디지털 네트워크 액트(Digital Networks Act·DNA) 입법에 착수하면서, 한국에서 수년째 답보 상태에 머물러 온 망 이용대가 논의도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글로벌 플랫폼의 트래픽 영향력이 커진 환경에서 EU가 선택한 제도적 해법이, 통상 논쟁에 가로막혀 온 한국의 망 이용대가 입법 논의에 새로운 선택지를 제시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립니다.
30일 통신업계에 따르면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최근 DNA 입법 추진안을 공개했습니다. DNA는 기존 유럽전자통신규범(EECC)을 폐기하고, 통신 규제를 지침이 아닌 규정 형태로 통합하는 것이 골자입니다. 규정은 별도의 국내 입법 없이 EU 전역에 동일하게 적용돼, 국가별로 파편화된 통신 규제를 정비하고 단일시장 효과를 강화하겠다는 취지입니다.
EU가 규제 개편에 나선 배경에는 디지털 트래픽 구조의 변화가 있습니다. 과거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가 트래픽 증가의 주된 요인이었다면, 최근에는 클라우드와 대규모 데이터 처리, 인공지능(AI) 기반 서비스 확산으로 네트워크 이용 환경이 구조적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통신망을 단순한 전송 수단이 아니라 데이터 기반 서비스 전반을 떠받치는 핵심 인프라로 재정의할 필요성이 커졌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 같은 인식 전환은 망 이용대가 논의 방식에도 반영됐습니다. DNA는 통신사(ISP)와 콘텐츠·플랫폼 사업자(CP) 간 망 이용 갈등이 발생할 경우, 회원국 규제기관이 자발적 조정 절차를 통해 협상을 지원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요금이나 의무 부담을 법으로 직접 규정하기보다, 과금 논쟁 자체를 비켜 가는 방식으로 트래픽 증가가 통신사의 지속 가능한 망 투자에 미치는 영향을 규제기관 차원의 조정과 가이드라인으로 다루겠다는 접근인 셈입니다. EU 통신 규제기구 협의체(BEREC)가 공통 가이드라인과 의견을 제시해 국가별 해석 차이도 최소화한다는 구상입니다.
절차 중심 해법은 한국 상황과 대비됩니다. 국내 망 이용대가 논의는 그간 미국 측으로부터 '미국 기업을 겨냥한 차별적 규제'라는 문제 제기를 받아왔습니다. 유튜브·넷플릭스·메타 등 미국 CP가 주요 대상이 되면서, 입법 논의가 한미 통상 이슈로 비화할 가능성이 늘 따라붙었습니다. 망 이용대가 법안은 '빅테크에 요금을 부과해야 한다'는 쟁점에 갇힌 채 국회 논의에서 반복적으로 속도를 잃어왔습니다.
EU가 요금 부과 대신 조정 절차와 가이드라인을 선택한 배경에는, 망 이용대가 문제가 통상 갈등으로 비화할 가능성을 최소화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해석이 나옵니다. 글로벌 플랫폼의 영향력을 문제 삼되, 특정 사업자에 대한 직접 과금이나 요율 규제 대신 규제기관의 개입 절차를 중심으로 한 관리 체계를 설계한 까닭입니다. 통신업계 관계자는 "통상 리스크를 이유로 논의를 회피하기보다, 통상 분쟁 소지를 줄일 수 있는 설계로 논의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유튜브를 이용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스토마토)
이런 문제의식은 국내 입법 논의에서도 점차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조인철 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이른바 '네트워크 안정화법'은 대형 부가통신사업자가 트래픽 경로 변경 등 국내 전기통신서비스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할 경우, 30일 전 사전 통지와 대응 시간을 법적으로 보장하도록 하는 내용이 핵심입니다. 서비스 품질 변화를 협상 수단으로 활용하는 행태를 줄이고, 통신망 불안정이 곧바로 이용자 피해로 이어지는 구조를 사전에 관리하자는 취지입니다.
조 의원은 "대형 부가통신사업자의 트래픽 경로 변경과 같은 결정은 국내 통신망 안정성과 국민의 통신 서비스 이용 품질에 직결되는 사안"이라며 "단순한 사전 통보를 넘어 실질적으로 위험에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을 제도적으로 보장해 이용자 보호의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앞서 이해민·김우영·이정헌·김장겸·최수진 의원 등이 발의한 망 이용대가 관련 법안도 국회에 계류 중입니다. 글로벌 CP의 망 영향력 확대에 대한 제도적 대응 필요성이라는 문제의식이 공통적으로 담겨있습니다.
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빅테크의 네트워크 영향력이 구조적으로 확대된 상황에서, 한국이 이를 시장 자율에만 맡길 것인지, 아니면 예측 가능한 제도 틀 안으로 관리할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며 "요금 부과 여부를 둘러싼 소모적 논쟁을 넘어, 망 이용 갈등을 제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현실적인 해법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지은 기자 jieunee@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