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오아시스를 바라다

오늘 부는 바람은

입력 : 2015-03-12 오전 10:43:00
1990년대 초반, 영국의 대중은 ‘oasis’를 마주하게 된다. ‘손가락이 20개 정도 된다면, 팔다리가 두어 개쯤 더 있다면 이렇게 연주할 수 있을까’ 싶은 강렬함과 정교함으로 무장한 하드락, 메탈의 시대가 저물고서 나타난 몇몇 밴드 중 하나인 바로 그 ‘oasis’다.
 
영국의 대중에게 오아시스는 큰 충격이었다. 노동자 계층에 한해서는 놀라움보다는 반가움이 앞섰으리라 생각한다. 그 자신들과 비슷한 행색을 하고 무대에 섰고, 무대 밖에서는 친구들과 펍에 서니 할 법한 말들을 TV에서 거침없이 내뱉었으며, 술에 취해 소란을 피우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영국의 대중들이 오아시스를 보며 느낀 충격, 혹은 반가움의 이유가 단지 그들의 외양과 행색뿐만은 아니었다. 다른 하나의 이유는 그들의 음악이었다. 이들의 음악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단조로운 구성이었다. 작곡의 대부분을 맡았던 노엘 갤러거가 오아시스의 데뷔 직전 집 앞의 계단에 앉아 기타 리프를 짜고 있을 때, 지나가던 한 사람은 그 리프를 듣고서 “이봐, 그 정도로는 라이브 클럽 무대도 서지 못할 거야.”라고 했을 정도로, 오아시스의 음악은 단순했다.
 
◇사진=바람아시아
 
하지만 가볍지 않았고, 질리지도 않았다. 오아시스의 앨범이 나올 때마다 그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사람은 지구적인 수준에서 증가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경우, 대중은 그 정교하고 강렬한 메탈 음악과 ‘철의 여인’으로 불렸던 마거릿 대처의 시기를 지나며 여러모로 지친 상태였다. 그들에게 오아시스와 오아시스의 노래는 좀 더 친근했고, 인간적인 면이 있었다.
 
오아시스는 자신들이 어떤 부류인지 온몸으로 드러냈지만, 그럼에도 거창한 ‘정신’이나 ‘주의’를 노랫말로 내세우지는 않았다. 오아시스의 노래들은 새로운 국가(國歌)로까지 불리며 상업적, 음악적 성공을 거두었다.
 
오아시스가 해체한지도 10년이 되어 간다. 갤러거 형제가 나뉘어 스스로의 음악과 싸우는 동안, 새로운 세대가 등장했다. ‘Chav(차브)’다. ‘공영주택에 살며, 정부의 복지혜택 수혜자인 하충계급과 그들의 자녀’를 뜻하는 단어다. 차브를 대하는 영국 내의 분위기는 쌀쌀맞다.
 
특히 미디어는 이들에 대해 가차 없이 혐오를 표출한다. 반사회적이고 게으르며, 천박한 소비성향을 가졌다는 식으로 차브를 뭉뚱그린다. TV 방송에서는 직접 차브를 초대해 이들이 얼마나 문제가 많은 집단인지 보여주는 쇼가 있으며, 차브가 많이 사는 지역을 중심으로 영국에서 가장 살기 나쁜 동네를 선정하는 사이트도 있다.
 
대처의 보수당이 집권한 이후 영국 노동계급의 기반이었던 중공업이 몰락한 뒤, 이 자리를 저임금 서비스업이 대체하게 되었다. 노동자들이 받아든 직업적 선택지는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질 낮은 일자리는 생활수준의 하락으로 이어졌다.
 
공영주택에는 자연스레 비슷한 상황에 놓인 가구들이 모이게 되었다. 그 공영주택에서 자란 아이들은 이제 성인이 되었거나 그 무렵에 있다. 영국의 미디어는 차브의 일탈행위나 소비성향을 비난하는 등, 그 계층을 비난한다. 차브가 어떻게, 왜 그렇게 자라났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굳이 영국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바다 건너 일본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길 가다 고개 들면 반 절은 되는 우리들 세대의 문제 또한 만만치 않으니까. 몇 년 전 88만 원 세대부터 3포, 5포 등 우리 앞에 붙는 수식어는 굉장히 많은데 그 중 희망적인 이름표는 단 한 개도 없다.
 
상황이 나아질 기미 또한 없다. 이렇게 흘러가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남들 다 하는 걸 안 하자니 불안하다. 그렇게 다들 머리와 몸이 따로 논다. 어디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 같긴 한데, 앞으로 나아가는지는 잘 모르겠다.
 
영국의 미디어가 차브에게 하듯, 미디어가 우리를 싸잡아 비판하지는 않는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대신 그들은 하루가 멀다고 우리들 이름표를 갈아치운다. 신문과 뉴스를 보면 5년이 아니라 당장 3년 후만 되어도 이 나라는 망하고야 말 것 같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우리가 있을 것 같다. 누군가 그랬던 것처럼 “눈높이를 낮추”고 적당히 살면 좀 덜 힘들까 싶다. 딱히 믿음이 가는 말은 아니지만, 자주 그런 생각이 든다.
 
오아시스의 노래부터 시작해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니까, 이삼 년 뒤의 내 일자리를 걱정하는 것보다 차라리 우리 세대에서 다시 한 번 오아시스와 같은 ‘반가운’밴드가 나타나길 바라는 편이 차라리 현실성 있겠다고 느껴진다. 그렇게 된다면, 알바 한 돈으로 그들의 CD를 몇 장이고 사 모을 텐데.
 
 
조휴연 기자 www.baram.asia  T  F
 
**이 기사는 <지속가능 청년협동조합 바람>의 대학생 기자단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젊은 기업가들(YeSS)>에서 산출하였습니다. 뉴스토마토 <Young & Trend>섹션과 YeSS의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asia)에 함께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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