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변소인 기자] "저희가 하고 있는 정부 연구과제 분야도 딥테크예요. 국가에서 핵심과제로 보고 다음 달에는 R&D(연구·개발) 우수사례로 상도 준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내년 보조금은 절반으로 줄인다고 통보받았습니다. 연구비를 반토막 내놓고 성과는 똑같이 내라는 건데 못해요. 그냥 반납하려고요. 상이나 주지를 말지…."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지난 27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정부 R&D 혁신방안 및 글로벌 R&D 추진전략을 발표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의료기기를 개발하는 스타트업 대표 A씨에게 R&D 예산 삭감에 대해 묻자 이 같은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우수한 R&D 사례로 상을 받은 뒤 관련 연구비가 절반으로 토막 날 위기에 놓인 A씨는 수상 소식에도 웃을 수가 없습니다. 딥테크 분야의 기술이기에 안심하고 있었던 A씨는 갑작스러운 예산 삭감 구두 통보에 기술 개발에 큰 차질이 생겼다고 전했습니다. A씨는 "R&D는 미래 먹거리다. 단순히 예산이 부족해서 줄이는 대상이 돼서는 안 된다"며 "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는 기술과 사람이 중요한데 R&D 예산을 줄이면 무엇으로 경쟁하라는 말인가"라고 하소연했습니다.
정부가 연구보조금으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는 '좀비기업'을 골라내고 연구비 카르텔을 바로잡겠다며 칼을 빼들었지만 벌써부터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대체로 전문가들은 멀리 보고 투자를 해야 할 R&D 예산이 줄어들면 연구 위축 및 국가 경쟁력 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반대로 이번 예산 삭감을 계기로 연구 풍토를 개혁해 연구비 효율화를 도모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지난 8월 정부는 내년도 R&D 예산을 25조9152억원으로 편성했습니다. 이는 올해 R&D 예산 31조778억원보다 5조1626억원, 16.6% 축소된 규모입니다. 특히 중소기업과 관련된 예산 항목은 더 크게 줄었습니다. 내년도 중기부 R&D 예산은 1조7701억원에서 25% 삭감된 1조3208억원입니다. 특히 관련 예산의 95.5%에 해당하는 1조2648억원은 협약형 계속사업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협약형 계속사업은 중소기업이 중소벤처기업부 산하 중소기업기술정보진흥원을 통해 2년 이상 기간을 두고 연구개발 과제를 수행하는 사업입니다.
정부는 비효율과 낭비요소를 덜어내기 위해 R&D 예산을 손질했다고 주장합니다. 불필요한 지출이 많았다고 본 것입니다. 대신 초격차, 딥테크 등 정부가 집중하는 분야에 예산을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아직 국회에서 R&D 예산을 확정하지는 않았지만 계속사업의 경우 일부 기업에 예산 삭감 등이 통보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같은 통보마저 누락된 기업의 경우 아예 해당사항이 없는 것으로 오인해 내년도 삭감에 대한 대비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인 셈입니다.
계속사업의 경우 자금이 갑자기 뚝 끊기게 되면 그 감액분은 중소기업의 부담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김경만 민주당 국회의원은 "정부가 깎은 예산은 결국 중소기업이 부담하거나 기업도 그만큼 사업비를 줄이게 만드는 부정적 효과를 초래할 것"이라며 "지난 3년간 최종 평가 과제 1만2430건 가운데 실패 판정을 받은 과제는 476건으로 3.8%에 불과하고, 정부가 사업비 환수를 처분한 금액도 연평균 1억6700만원에 불과한 데도 중소기업을 좀비기업이라며 예산부터 삭감해버린 정부가 과연 중소기업을 위하는 정부인지 의심스럽다"고 비판했습니다.
반면 이번 예산 삭감에 대해 R&D 사업을 제대로 손질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실질적 사업화는 결국 기업의 몫이라는 시각인데요. 임채운 서강대 경영학과 명예교수는 좀비기업, 전문 R&D 컨설팅 브로커 등을 문제 삼으면서 "중소기업에 대한 R&D 과제는 많으나 그동안 사업화는 미약했다. 시장에서 상용화할 수 있는 기술을 만드는 데 집중을 해야 한다"며 "정부의 R&D 예산은 마중물 역할만 해주면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의준 중소기업정책개발원장은 "R&D 연구비를 놓고 항상 말이 있어온 것은 사실이나 R&D 예산을 삭감하는 것과 적재적소에 올바른 R&D 자금으로 쓰느냐는 다른 문제"라고 짚었습니다. 기술 기반의 강소기업이 우리나라 미래의 성장 동력인 만큼 R&D 예산을 줄이기보다는 감시를 철저히 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는 시각입니다. 특히 "중소기업의 경우 스스로 자금을 들여 R&D를 하다가 망하는 경우가 많다"며 정부발 R&D 자금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좀비기업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심사자들의 전문성을 키우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원장은 "R&D 과제를 서류 위주로 선정하다보니 소위 말하는 R&D 자금을 쉽게 따는 선수들이 있다"며 "그것은 공급하는 정부의 몫이지 중소기업의 몫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좀비기업을 골라내기 위해 예산을 삭감할 것이 아니라 정부 측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의견입니다.
변소인 기자 byline@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