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김성은 기자] 이재명정부의 '실용 외교'가 본격적인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일각에서는 '외교 난맥'의 시작이라는 평가까지 내놓고 있습니다. 이재명정부의 대일·대중 관계 설정이 이번 순방으로 확인된 영향입니다.
일본과의 과거사,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문제 등은 '실용외교'라는 미명 아래 묻혔습니다. 방미 일정 중에는 '안미경중(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 불가능'을 언급하며 '한·미 동맹'에 방점을 찍었습니다. 결국 한국 경제와 밀접한 중국을 어떻게 달래며 미·중 사이를 오갈지가 큰 과제입니다.
27일 대통령실에 따르면,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23일 일본으로 출국해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와 한·일 정상회담을 갖고, 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25일(현지시간) 취임 후 첫 한·미 정상회담을 치렀습니다.
한·일 "공동 이익 위해 협력"…과거사 '시한폭탄'
한·일 정상회담의 가장 큰 성과는 '셔틀 외교' 복원과 함께 이른바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계승하며 미래 지향적 관계에 뜻을 모았다는 점입니다. 이는 뒤이은 한·미 정상회담의 성과를 뒷받침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양 정상은 17년 만에 회담 결과를 공동 문서 형태로 도출해냈는데요. 공동으로 채택한 언론 발표문에 "이시바 총리는 1998년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을 포함해 역사 인식에 관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하고 있음을 회담에서 언급했다"는 문구가 담겼습니다.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이란 과거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가 한국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의 뜻을 표명한 첫 사례인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말합니다.
지난 15일 이시바 총리가 패전 80년을 맞아 열린 행사의 추도사에서 '반성'이라는 단어를 언급했고, 이 대통령 또한 방일 당일 공개된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과거를 직시하되 미래로 나아가자"며 손을 내밀었던 결과입니다.
이재명 대통령과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23일(현지시간) 일본 도쿄 총리 관저에서 한일 소인수 정상회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다만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 동원 등의 과거사는 물론,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로 인한 해양 오염 등 '화약고'와 같은 문제가 묻힌 것은 오점으로 남았습니다. 이 대통령이 '과거 직시'를 강조해왔고, 여당인 민주당이 윤석열정부 시절 오염수 방류에 크게 반발했던 기조와는 차이가 있어 비판이 제기됩니다.
정의기억연대는 지난 24일 입장문을 내고 "실용 외교라는 명분에 역사 정의가 가려진 정상회담"이라고 혹평했습니다. 정의연은 "일본 정부의 부당한 역사와 피해자 인권침해 문제는 어디에도 없었다"면서 "대한민국 정부는 가해자의 책임 인정과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당당히 요구하면서 한·일 관계 대전환을 모색했어야 했다"고 지적했습니다.
과거사 문제는 당장 올해 가을 열릴 예정인 사도광산 노동자 추도 행사 참석을 놓고 수면 위로 올라올 전망입니다. 사도광산 추도식은 지난해 7월 일제강점기 강제 노역 현장인 사도광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후 양국 합의에 따라 매년 여름 개최하기로 한 추도 행사입니다. 한국 정부는 고위급 인사 참석 등으로 일본의 책임 있는 자세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상응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한·일은 미국 관세 폭탄이라는 공동 문제에 의해 긴밀하게 소통하게 됐다"며 "국제 정세를 볼 때 양국이 과거사 문제로 날카롭게 각을 세울 때가 아닌 만큼 이런 공조가 지속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중, 거센 반발..."사드 기억하라"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탈 안미경중 선언'으로 중국과의 관계 설정이 새로운 시험대로 떠올랐습니다. 이 대통령은 지난 25일(현지시간) 미국 싱크탱크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초청 강연에서 "과거 한국은 안미경중의 태도를 취한 게 사실"이라며 "이제 과거와 같은 태도를 취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고 말했습니다.
앞서 이 대통령은 지난 24일 미국으로 가는 대통령 전용기 안에서 "우리 외교의 근본은 한·미 동맹"이라고 언급한 바 있는데요. 한·미 동맹의 중요성을 대외적으로도 명확히 한 셈입니다.
이에 중국에선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계열의 영자신문 <글로벌타임스>는 이날 사설에서 "한국이 중국과 거리를 두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한다면, 한국 경제와 국민의 삶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고 가장 근본적 이익이 훼손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래픽=뉴스토마토)
지난 2016년 한국의 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 결정 사례를 꺼내기도 했습니다. 글로벌타임스는 "'안미' 접근은 한국에 진정한 안보를 가져다주지 못했다"며 "사드 배치는 한반도 핵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을뿐더러 중국과의 관계를 심각하게 훼손했고 한반도 긴장 역시 더욱 고조됐다"고 했습니다.
향후 한·중 관계 험로가 불가피해 보이는 대목입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싸움에 한국의 등이 터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 대통령이 어떤 묘수를 낼지 이목이 집중됩니다.
이 대통령이 일본과 미국을 방문하는 동안 중국 특사단(단장 박병석 전 국회의장)은 방중길에 올랐는데요. '중국 달래기'라는 분석이 나옵니다. 중국 특사단은 지난 24일 중국에 도착해 왕이 중국공산당 중앙외사판공실 주임 겸 외교부장을 만나고 이날 귀국합니다.
강준영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는 <뉴스토마토>와 통화에서 "중국은 한국과 미국의 조선업 협력 등으로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인데, 안미경중 발언은 굳이 안 해도 될 말이었다"며 "굳이 (미국과의 관계를) 강조해서 중국에 빌미를 줄 필요는 없지 않냐"고 꼬집었습니다.
그러면서 "정부가 안미경중이라는 프레임을 바꿔보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며 "중국과의 관계 설정은 앞으로 이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만남 이후 발언을 봐야 한다. 우리와 중국은 관계 '모색기'에 있다"고 진단했습니다.
김성은 기자 kse5865@etomat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