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이스트 깁슬랜드의 들판에서 자라는 스위트콘. (사진=Gettyimagesbank)
[뉴스토마토 임삼진 객원기자] 호주 퀸즐랜드대 안나 콜투노프(Anna Koltunow) 교수가 이끄는 연구팀이 내달 호주 동부에서 시험 재배할 수수밭에는, 보통의 씨앗과는 전혀 다른 유전적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른바 ‘아포믹시스(apomixis·무성생식)’ 기술입니다.
아포믹시스는 본래 자연에서 약 300여종의 식물이 활용하는 방식으로, 난자와 정자가 만나지 않아도 씨앗이 형성됩니다. 그러나 쌀, 옥수수, 밀처럼 세계 식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작물에서는 관찰되지 않고 있습니다. 연구진은 이를 인위적으로 구현해 곡물에도 적용하려는 시도에 성공 단계에 다가서고 있습니다. 9월2일 네이처뉴스(Nature News)는 ‘무성생식 종자: 자가 복제 작물이 어떻게 곧 우리의 식량을 바꿀 수 있을까’라는 제목으로 이 내용을 상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이를 토대로 ‘성 없는 씨앗(Sexless seeds)’의 세계를 살펴봅니다.
아포믹시스, ‘성 없는 씨앗’의 과학
‘성 없는 씨앗’의 핵심 원리는 다음 두 가지로 열려져 있습니다.
▲ 감수분열 억제(Meiosis Suppression): 보통 식물은 감수분열을 거쳐 부모의 절반 염색체만 가진 생식세포를 만듭니다. 하지만 ‘MiMe(유사분열로 대체된 감수분열)’ 돌연변이는 이 과정을 차단해 부모와 동일한 염색체 구성을 지닌 생식세포를 만듭니다.
▲ 단위생식(Parthenogenesis): 정자 없이 난자가 곧바로 배아로 발달하도록 유도하는 것입니다. 미국 조지아대 연구진은 천연 아포믹스 식물에서 ‘BABY BOOM’ 유전자와 유사한 유전자를 확인했고, 이를 다른 식물에 도입해 수정 없는 배아 형성을 재현했습니다.
이후 캘리포니아대 데이비스의 벤카테산 순다레산 팀이 MiMe와 BABY BOOM을 결합해 클론 벼를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초기에는 씨앗 효율이 낮았지만, 최근 중국 연구진은 BABY BOOM 유전자 발현을 강화해 95% 이상이 클론으로 발아하는 벼를 개발하며 상용화 단계에 근접했습니다.
콜투노프 교수는 자신의 연구가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의 소규모 농민들에게 저렴한 고수확 수수(Sorghum bicolor)와 강낭콩(Vigna unguiculata) 작물을 제공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농민들은 복제 종자를 저장해 수년간 파종할 수 있어 비용을 더욱 절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그녀의 연구는 워싱턴주 시애틀에 위치한 자선 단체인 게이츠 재단의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중국 국가벼연구소의 왕커젠(Kejian Wang) 연구원은 네이처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농업의 혁명을 불러올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농업과 시장의 지형을 바꿀 기술
아포믹시스가 본격 도입되면 농업 전반의 판도가 바뀔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하이브리드 씨앗은 매년 다시 구입해야 했습니다. 유전자가 섞이는 탓에 품질이 균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포믹시스를 활용하면 하이브리드 강세(heterosis)가 세대를 넘어 그대로 복제돼 동일한 품질의 씨앗을 무한히 확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특히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소농에게 값싼 고수확 씨앗을 보급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다국적 종자기업에게도 매력적입니다. 코르테바 애그리사이언스는 이 연구의 파트너로 참여하며, 아포믹시스를 이용해 신품종 개발 기간을 단축하고, 원하는 형질을 고정할 수 있는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술 상용화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유전자 편집 기술이 적용된 만큼, 안전성 검증과 소비자 수용성이라는 사회적 합의 과정이 필수적입니다. 대규모 규제 승인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거대 기업뿐이라는 점에서, 소농을 위한 진정한 혁신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도 남습니다.
연구자들은 이를 인쇄술의 혁명에 비유합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기가 단 두 권의 책에서 수천 권으로 다양성을 폭발시킨 것처럼, 아포믹시스는 세계 각지 농민에게 맞춤형 하이브리드 씨앗을 제공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책의 다양성이 폭발적으로 늘었듯, 씨앗의 다양성 역시 폭발적으로 증가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과학이 열어준 씨앗 혁명의 결실이 소농의 밭까지 골고루 전해질 수 있을 것인지 다국적기업에만 큰 이익을 가져다주는 일인지 논란의 여지는 여전히 큽니다. 또 다른 더 중요한 문제는 아포믹시스가 본질적으로 유전자 편집 작물이기에 안전성 검증과 사회적 합의라는 두 가지 관문을 넘지 않으면 시장에 진입하기 어렵습니다. 농업 혁명과 유전자 조작이라는 가치의 충돌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는 결국 어느쪽을 중시하느냐를 정하는 인류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기사 DOI: https://doi.org/10.1038/d41586-025-02753-x
임삼진 객원기자 isj2020@daum.net